종교-철학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는 늙은 나무가 될 터이니 편히들 와서 쉬시게'

최만섭 2017. 11. 1. 06:57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는 늙은 나무가 될 터이니 편히들 와서 쉬시게'

입력 : 2017.11.01 03:42 | 수정 : 2017.11.01 03:45

[96] 신숙주를 위한 변명

집현전 학자 신숙주… 올해가 그 탄생 600주년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신숙주가 편들면서 변절자의 상징으로
동료 성삼문과 함께 요동 땅 오가며 훈민정음 개발 간여
북방 국경 지키는 무신, 일본과 화친 유도한 외교관, 조선 초 왕권 지킨 정치가
'아내가 비난하며 자살' '단종의 비를 첩으로 달라' '변질하기 쉬운 숙주나물'
비난은 모두 근거 없는 '소설가의 창작'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그리하여 내가 물었다. "집안에서 숙주나물 먹지 않나요?" "잘 먹습니다. 요번 한글날에도, 매번 다른 나물 안 올라갑니다. 할아버지께서 그 나물 너무 좋아하셔서 꼭 제사상에 올립니다. 대신 녹두나물이라고 하지요." 대답을 한 사람 이름은 신인식(申寅植)이다. 그가 '할아버지'라 한 사람은 600년 전 태어난 사람이다. 이름은 신숙주(申叔舟·1417~1475)라 한다. 문제적 인물, 바로 그 신숙주 이야기다.

책을 좋아했던 아이들

신숙주 초상(보물 613호). 구봉영당에 있다.
신숙주 초상(보물 613호). 구봉영당에 있다.

양쪽으로 개울을 끼고 있는 정자 쌍계정(雙溪亭)에서 그가 책을 읽었다. 정자가 있는 마을은 전남 나주 금안마을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이요, 외가다. 훗날 시(詩)와 글을 겨루는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붙었으니, 아마도 그는 사서삼경보다는 시와 문을 즐겨 읽었을 터이다. 관직을 얻은 아비 신장(申檣)을 따라 신숙주도 서울로 올라갔다. 대략 일곱 살 즈음이다. 지금 400년 늙은 푸조나무가 쌍계정을 지킨다.

그 무렵 한 살 아래 성삼문도 책을 읽었다. 충청도 홍주, 지금의 홍성 외가다. 신숙주보다 3년 일찍, 나이 열일곱에 생원시(生員試)에 붙은, 경학에 밝은 사내다. 성군(聖君) 세종의 시대, 이 천재적 사내들은 당대 최고 학술기관인 집현전에서 함께 근무를 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저자 목록에도, 그리고 동국정운 연구를 위해 요동 땅에 명나라 학자를 만나러 갈 때도 두 사람은 함께였다. 운명이 갈리던 그날까지,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보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맏형 문종이 일찍 죽어버리고 조카 단종이 권력을 쥐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김종서며 황보인이며 늙은 개국공신들이 단종을 포위하고 전횡하고 있지 않은가. 왕이랬자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양의 눈에 조카 단종은 김종서 집단이 노랗게 점을 찍어놓은 결재 서류에 도장이나 찍는 무기력한 권력자였다.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닮아서, 무사 기질이 충만하고 권력욕에 불타던 수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세종은 문약한 형에게 왕위를 주고, 자기는 세상 잊고 살라고 군호까지 진양에서 수양대군으로 바꿔놓았으니('수양(首陽)'은 백이, 숙제가 세상 등지고 들어가 살았다는 산 이름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권력 찬탈을 감행하니, 계유정난이다. 김종서 무리를 척살하고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오른 뒤 자기 무리들을 공신으로 책봉했다. 계유정난의 '정난'은 정란(政亂)이 아니라 정난(靖難), '난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신숙주의 고향이자 외가인 전남 나주 금안마을에는 쌍계정 정자가 있다. 그가 어릴 적 공부했던 곳이다. 정자를 지키는 푸조나무는 400살이 넘었다. 남긴 업적은 가리고, 과장된 변절자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다. /박종인 기자

여러 공신 가운데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2등 공신 신숙주. 그리고 3등 공신 성삼문. 집현전 동료 모두가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렀던 천재 학자 박팽년은 이런 시를 썼다.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취하니(聖主鴻恩倒玉巵)/즐기지 아니하고 어이하랴(不樂何爲長不樂)/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 노래하세(賡歌醉飽太平時)’(연려실기술)

사육신 가운데 셋이 계유정난 공신록에 이름을 올렸거나 부도덕한 영의정 수양을 찬미했으니, 이때까지는 쿠데타에 대한 집현전 학자들 입장이 정리되지는 않았다.

변절자 신숙주

2년 뒤 1455년 단종을 물리치고 수양이 왕위에 올랐다. 관료 권한이 대폭 축소되고 왕권이 강화됐다. 정승들 논의를 거치던 국정을 왕이 직접 결정했다. 배운 바와 전혀 다른 정치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항의하던 예조참판 하위지는 곤장을 맞고 옥살이를 했다. 집현전 학자들이 동요했다. 전주 이씨 왕권과 사대부의 신권(臣權)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이었다. 신숙주는 달랐다. 계유정난 때 우승지로, 이듬해 비서실장인 도승지로 승진해 직업 정치가로 들어선 그였다.

집현전은 세종 이후 정치 관여가 금지된 학자 집단이었다. 그런데 신숙주는 신흥 정권에 붙어서 관직을 맡지 않았는가. 형제 같았던 성삼문은 신숙주를 부도덕한 변절자로 낙인찍었다. 그 변절자의 수괴 수양은 처단 대상이었다. 세조가 우부승지로 임명한 성삼문은 국새(國璽)를 부여잡고 통곡했다. 세조는 성삼문을 오래도록 째려보았다.(남효온, '추강집')

 

이미지 크게보기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신숙주묘. 아내 무송 윤씨와 합장돼 있다.

그해 10월 신숙주는 명나라로 떠났다. 황제로부터 새 왕을 허가받는 주문사로 떠났다. 변칙적인 권력 이양을 합법화하는 작업이었다. 세조에게는 가장 중대한 일이었다. 이듬해인 1456년 정월 23일 아내 윤씨가 병을 앓다 죽었다. 신숙주는 중국에서 소식을 들었다. 함께 떠났던 맏아들 신주도 병을 얻어 귀국길에 죽었다.

그리고 6월 집현전 학자 다섯과 무신 유응부의 사육신 사건이 터졌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과 유응부이다. 복위 음모가 발각되고, 역신들이 두루 참살되고, 피비린내 나는 온갖 일들이 벌어진 것은 두 번 말할 이유가 없다. 고문받던 성삼문이 옛 친구 신숙주에게 '네 악함이 이에 이를 줄은 몰랐다'고 일갈한 에피소드도 알 사람은 다 안다. 신숙주는 의리를 배신한 변절자의 상징으로 낙인찍혔다.

신숙주가 한 일, 그 평가

이후 신숙주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세조를 이은 예종이 요절하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옆에서 아비처럼 보필하는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함께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정권을 최고위 관료로 살았다. 그동안 그가 한 일들을 본다.

훈민정음 창제에 깊숙이 간여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8인 저자 가운데 하나다. 친구 성삼문과 함께 요동을 오가며 만든 책이 동국정운이다. 그 서문을 신숙주가 썼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훗날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께서 "할 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신숙주가 답했다. "원컨대 일본과 실화(失和)하지 마옵소서."' 북방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고 남방으로는 왜(倭)를 위시한 해동 제국을 외교로 다스렸다. 그 내용을 정리해 성종에게 바친 책이 '해동제국기'다. 이 책은 일본 막부 사무라이들 필독서가 되었다.(임수간, '동사일기', 1682)

이미지 크게보기
충북 청주에 있는 묵정영당. 신숙주 초상을 모셨다.

그리고 1475년 그가 죽으매, 성종이 제문을 쓴다. '아름다운 명성은 멀리까지 퍼져, 경은 유감이 없을 터인데 나만 마음이 아프다.'(박덕규, '신숙주 평전') 서울 종묘에는 성종 위패 옆에 신숙주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변절자가 죽으며 한 나라 왕을 마음 아프게 한다. 실록 사관이 쓴 졸기(卒記)는 1300자가 넘는다. 그의 묘지(墓誌)는 사육신 이개의 사촌 이파(李坡)가 썼다. 그가 남긴 문집 보한재집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은 국량이 크며 그 한계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서문을 쓴 사람은 김종직이다. 명분과 의리를 이상으로 삼는 사림파의 시조다. 그 김종직까지 그를 일러 변절자라 부르지 않고 찬미했다. 그러고 보니, 신숙주를 변절자라 비난하는 기록은 실록 어디에도 없다. 오직 신숙주에 의문을 가진 헌종에게 "사육신은 실로 백세(百世)에 특립(特立)한 무리인데, 어찌 사람마다 미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승지가 변호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헌종실록 헌종 11년 11월 9일) 이상하지 않은가. 21세기 대한민국 상식과 맞지 않는 사실들 아닌가.

왜곡

간략하되, 정곡만 본다. '사육신 반역이 발각되던 그날 집으로 돌아온 신숙주에게 부인 윤씨가 소리 내어 운다. "대감이 살아오실 줄 몰랐소." 숙주가 한참 고개를 숙였다가 드니 이미 부인은 목을 매고 늘어졌다.' 기록 어디에도 이런 사실은 없다. 다만 1928년 이광수가 쓴 소설 '단종애사'에 나온다. 소설가 박종화는 '숙주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다'고 묘사했다.(소설 '목매이는 여자') 윤씨 부인은 사육신 사건 다섯 달 전에 이미 병사했다. 이들 작가가 인용한 사료 '연려실기술'에는 윤씨 부인 사망에 대해 모순된 자료가 들어 있다.

신숙주가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를 첩으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실록에 따르면 정순왕후를 욕심낸 사내는 윤사로다.(세조실록 세조 3년 10월 24일) 이를 일제강점기 사학자 김택영의 '한사경'은 신숙주 짓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광수의 단종애사도, 김택영의 한사경도 사육신의 의리와 충절이 필요한 일제강점기 작품들이다. 배신의 상징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수양대군이며 신숙주였다.

그리하여 신숙주의 또 다른 후손 신원식(申元植)이 웃는다. "사육신 충절을 높이다 보니까 그렇게 했지만…그래서 글이 무섭다는 거예요." 이광수 소설이 나오기 대략 10년 전 상해 임시정부에 신석우, 신백우, 신규식, 신채호 이렇게 네 신씨가 활동했다. 신숙주의 직계 손자들이다. 후에 들으니, 그 옛날 이광수 집으로 후손들이 몰려가 거칠게 항의했다고 했다.

[11월 5일(일) 오전 11시 40분, TV조선 '땅의 역사-영릉 편'] 

TV조선 '땅의 역사-영릉 편'

11월 5일(일) 오전 11시 40분 TV조선은 ‘박종인의 땅의 역사 세종 영릉의 비밀’ 편을 방송한다. 계유정난을 비롯해 세종 사후 조선 왕실에서 벌어진 각종 흉사의 원인을 찾던 조정은 서울 내곡동에 있던 세종의 능,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세종 사후 18년 만에 내린, 풍수사상에 입각한 결정이다. 이로 인해 여주 명당자리에 있던 한산 이 씨와 광주 이씨 묘가 파묘되고 강제 이장됐다. 세종은 생전에 자신의 왕자들과 손자 단종의 태를 경상북도 성주 태봉에 집단으로 매장했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다. 이 또한 풍수사상에 입각한 정책이었고, 그 주변에 있던 성주 이씨 문중 묘 또한 강제 이장됐다. 명당을 둘러싼 전주 이씨, 한산 이씨, 광주 이씨 그리고 성주 이씨의 유택(幽宅) 쟁탈전 이야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1/20171101003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