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김구를 정말 고종의 전화가 살렸을까

최만섭 2017. 10. 28. 06:27

 김구를 정말 고종의 전화가 살렸을까

  •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입력 : 2017.10.28 03:01

사형 당일 기적적으로 죽음 면했다는 이야기 기록과 다른데 실화맞나
요즘 일부 역사 영화는 왜곡 넘어 창조하는 수준 '사실'이란 말 신중했으면

김구를 정말 고종의 전화가 살렸을까
세상에는 사실도 아닌데 사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령 이런 거다. '민비 시해 며칠 후 한 청년이 칼 찬 일본군 장교를 때려죽여 인천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이 결재한 서류를 훑어보던 누군가가 살해 이유에 '분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재가를 요청했고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사형 집행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필 그날이 사형 집행일이었고 인천은 너무 멀었으나 다행히 며칠 전 개통된 전화라는 문명이 있어 청년은 가까스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고 그날은 인천에 전화가 놓인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때 청년을 살린 telephone의 첫 우리말 이름은 덕률풍,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청년의 이름은 김창수였다.' 정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실이라면 말이다.

젊은 시절 백범을 살린 전화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1896년 10월. 한국전자전기통신연구소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최초 전화 개통일은 1898년 1월이다. 전화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가 마치 진짜처럼 돌아다니는 것은 '백범일지'의 권위 때문이다. '백범일지'에 이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개인의 기록이 공적인 기록보다 우선하는 사례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백범일지' 둘이다. '백범일지'에는 '(감옥에서) 아침에 황성신문을 보니 인천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백범이 인천 감옥을 탈출한 것은 1898년 3월, 황성신문이 창간된 것은 1898년 9월이다. 역시 순서가 맞지 않는다.

물론 사람의 기억은 온전할 수 없다. 게다가 원본 '백범일지'는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지금은 쓰지 않아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이 수두룩하고 필체는 아주 예술이다. 백범 스스로 총알체라고 부른 이 필체는 총격 사건의 후유증으로 생긴 수전증 때문이다.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쓰다 보니 가뜩이나 판독이 어려운 내용을 기이한 서체가 뒤덮고 있는 것이다. 해서 백범 생존 시에도 원문이 아닌 윤문으로 소개되었고 우리가 이제껏 읽은 '백범일지'는 그 윤문한 것을 다시 현대어로 쓴 것들이다. 백범은 윤문한 책들이 출간된 뒤에도 원문에 꾸준하게 첨삭을 했고 일부는 먹칠로 지워버렸다. 많은 사람이 읽었지만 어쩌면 그 누구도 읽어보지 못한 것이 '백범일지'일지도 모르겠다.

백범의 인천 감옥 시절을 다룬 영화 '대장 김창수'를 보러 가는 길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이 두려움은 영화 '덕혜옹주'의 기억 때문이다. 역사 왜곡을 넘어 아예 역사 창조에 도전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겁이 났다. 혹시라도 덕혜옹주가 만주에서 말 달리며 독립운동하는 장면이 나올까 봐. '대장 김창수'도 비슷했다. 감옥 영화의 지존인 '쇼생크 탈출'을 베낀
것은 영화적 오마주(선배에게 바치는 예술적 아양)라고 치자. 다행히 전화 이야기는 안 나온다. 그러나 고종이 직접 백범에게 전보를 치고 그에게 글을 배운 죄수들이 상소문을 올리는 장면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영화 시작 전 '이 영화는 사실에 기반했습니다'는 자막이 나온다. 제발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무서워서 어디 영화 보러 가겠니.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27/20171027021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