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박해현의 문학산책] 선학동은 먼 곳에 있는 섬 같아서 그 섬에 가고 싶다

최만섭 2017. 8. 24. 08:07

[박해현의 문학산책] 선학동은 먼 곳에 있는 섬 같아서 그 섬에 가고 싶다

입력 : 2017.08.24 03:13

이청준 전집 34권으로 완간… 소설 전집의 새 지평 열어
단편 '선학동 나그네'와 영화 '천년학' 배경이었던
장흥의 고향과 그 앞 섬들, 작가를 그리워하며 찾게 돼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고향은 전남 장흥이다. 그가 고향 땅에 묻히던 날, 수많은 문인이 서울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 마을 회관 앞에서 노제(路祭)가 열렸다. 이청준 문학 중 일반에 널리 알려진 작품은 소설 '서편제'다. 소리꾼들은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의 원작인 그 소설 덕분에 판소리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고마워했다. 노제에 달려온 이지선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불렀다. "춘향 형상 가련하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뿐…"

그날 동향인 소설가 한승원은 추모사를 통해 '서편제'에 실린 단편 '선학동(仙鶴洞) 나그네'를 언급했다. 그는 "이청준 선생은, 한 장님 여인이 뿜어낸 소리로써 학을 날게 하고, 두리둥 두리둥 지령음이 울리게 함으로써 그 마을을 신화의 공간으로 형상화해 놓았습니다"라며 "선생이 가는 곳이 아마 그 선학동일 터입니다"라고 했다. 이청준이 남긴 숱한 걸작 중에서도 소설 '선학동 나그네'는 어느덧 그의 상징적 작품이 됐다. 하지만 이청준이 그 소설을 발표한 1979년은 물론이고 그가 타계한 2008년까지만 해도 선학동이란 마을 이름은 없었다. 장흥군에 속한 포구 마을 중 산 아래에 있다고 해서 '산저(山底)마을'이라 불린 곳을 무대로 작가가 상상의 나래를 편 소설이 '선학동 나그네'였다. 작가가 세상을 뜬 뒤 임권택 감독이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 '천년학'을 이곳에서 촬영해 이름이 더 알려지자 마을 주민들이 군청에 건의해 2011년 선학동으로 지명을 바꾸었다. 상상이 현실을 탈바꿈시킨 셈이다. 봄에는 유채꽃, 가을엔 메밀꽃으로 물들어 외지인들이 즐겨 찾으며 '이청준 문학 기행'을 음미하는 곳이 됐다.

어떤 소설은 줄거리보다는 선명한 이미지로 오래 기억된다. '선학동 나그네'도 그런 소설이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 뒤로 해가 설핏 기울 때, 포구에 바닷물이 들이차면 산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면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학의 형상을 취한다는 선학동. 30여 년 전에 처음 읽은 그 소설의 줄거리는 희미해졌어도 비상학(飛上鶴) 묘사는 여전히 뚜렷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최초의 이미지는 사실 되살아나지 않는다. 첫 감동의 오묘한 신비는 복제되지 않은 채 늘 모호하게 환기되나 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청준 전집'이 지난 10년 동안 순차적으로 나온 끝에 최근 34권으로 완간됐다. 마무리를 짓는 두 권 중 한 권이 '선학동 나그네'란 제목을 달고 나왔다. 다른 단편 '빈방','살아있는 늪','흐르지 않는 강'과 함께 실렸다. '선학동 나그네'는 원래 '남도(南道) 사람' 연작 중 하나다. 다섯 편으로 된 이 연작은 뒷날 영화 '서편제'의 모태가 됐다. 이청준의 소설 세계에서 '남도 사람' 연작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청준 소설의 주류는 지식인 독자를 염두에 둔 관념 소설이란 측면에서 찬반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남도 사람' 연작은 판소리의 미학과 전라도의 한(恨)이 어우러져 독자의 가슴에 구체적으로 와닿는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이 연작을 '전통 예술과 토속 정서'의 측면에서만 읽는다면 소설의 의미를 빈약하게 만든다. 이청준 문학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평론가 김치수(1940~2014)는 "이청준 소설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한국인의 상처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한 바 있다. 그는 '남도 사람' 연작에 대해 "말로써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라며 "그것은 소리만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내용 없는 형식의 극치'를 상징하면서 '소리'에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찾았다"고 풀이했다.

'이청준 전집'은 한 작가가 일군 소설 세계를 온전히 정리했을 뿐 아니라 지금껏 보지 못한 소설 전집의 새 지평을 열기도 했다. 평론가 이윤옥이 편집을 맡아 큰일을 해냈다. 이청준이 남긴 초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각 작품이 발표된 뒤 수정된 과정도 모두 추적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해설을 달았다. 가령, '선학동 나그네'에서 주막을 마른 버섯에 비유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작품도 분석해본 뒤 '이청준은 종종 집을 버섯에 비유했다'고 일깨워줬다. 마찬가지로 이청준 소설에서 '학'은 망자의 영혼을 자주 가리켜왔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작가의 남다른 개인 상징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이청준 소설을 되돌아볼 때마다, 임권택 감독이 작가의 장례식을 지켜본 뒤 들려준 말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저 멀리 있는 섬들 속으로 이청준 선생과 함께 배를 타고 가면, 어떤 때는 광선에 따라 섬이 가깝게 다가오기도 하다가, 멀어지면서 사라지기도 했다"라면서 "그 장면을 찍으려고 작가와 함께 두 번 배를 타고 나갔지만 다시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청준이 상상한 선학동 역시 그러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3/20170823036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