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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의 극장傳] 여름에 허수아비들을 보았다

최만섭 2017. 6. 13. 07:30

[박돈규의 극장傳] 여름에 허수아비들을 보았다

입력 : 2017.06.13 03:10

데뷔 50년 극작가 오태석, 분장실은 배우들 몫인데 야전침대 들여놓고 작업해
"가장 고마운 건 단원들… 벌판에 선 허수아비처럼 도망도 안 가고 견디니까"

박돈규 주말뉴스부 차장
박돈규 주말뉴스부 차장

배우 신구를 만나러 서울 명동예술극장에 갔다가 색다른 풍경을 보았다. 거울과 서랍장, 의자뿐이던 분장실에 야전침대가 놓여 있었다. 냉장고도 보였다. 극단 목화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78)이 분장실에 또 베이스캠프를 차린 것이다. "유난스럽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네." 드라마센터 동기인 신구가 툭 내뱉었다.

분장실은 배우의 공간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분장을 하면서 자기 몸을 벗어나 배역으로 들어간다. 목청을 가다듬거나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며 긴장을 풀기도 한다. 공연이 끝나면 이곳에서 분장을 지우며 자신으로 돌아간다.

데뷔 50년을 맞은 오태석은 배우 전무송·이호재와도 친구 사이다. 같은 방향을 보며 같은 속력으로 연극을 했다. 이호재가 불평한 적이 있다. "국립극단 시절 (전)무송이 분장실 앞에는 예쁜 여자들이 꽃다발 들고 서 있고, 나한텐 털이 시커먼 놈들이 몰려와서 외쳤지. 막걸리 한잔합시다!"

오태석에겐 꽃다발도 막걸리도 없다. 그래도 무대 옆에서 죽기 살기로 연극을 고민한다. 몇 해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이 퍼낸 우물에서 두레박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요. 바닥나기 전에 뭘 만들어야 하는데, 우물쭈물하다 보니 시간이 그다지 안 남았어요…." 이번엔 뭘 길어 올릴까 궁금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갔다.

느린 칼춤으로 무대가 열린다. 300년 반목해온 두 집안 청년들은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팔엔 굵은 밧줄을 감았다. 몸통이 방패이자 칼이다. 가야금과 피리, 아쟁이 구슬프게 운다. 으르렁거리고 싸우던 두 집안 사이에 기어이 사랑이 움튼다.

꽁지머리 총각(로미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입맞춤을 하곤 "내 입술이 짊어진 죄, 당신 입술로 씻겠소"라고 눙친다. "성(姓), 이름 구겨 던지고 대신 날 가져" 했던 갈머리집 외동딸(줄리엣)이 "손가락 넣어서 내 사랑 도루 게워" 투정하는 장면도 앙증맞다. 얼굴을 등불 삼아 치르는 첫날밤, 무대를 뒤덮은 커다란 이불 홑청 속에서 벌이는 술래잡기는 풋풋하고 달착지근하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오태석이 번안하고 연출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토속적이다. 이야기 골격만 빌려왔을 뿐, 거죽은 한국식 상차림이다. 탈춤과 소고춤으로 흥을 돋우고 놋그릇 두드려 소리를 퍼올린다. 줄리엣은 장독대에서 된장을 떠먹은 다음 독약을 마신다. 오태석은 전염병 메르스도 슬쩍 끼워 넣었다.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이거나 공간을 겹치면서 장면을 만들었다. 원작과 달리 화해 없는 결말을 보여주며 그는 묻는다. 계속 이렇게 쌈질하며 살 것이냐고.

오태석은 '춘풍의 처' '자전거'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같은 연극을 통해 관객이 생각에 잠길 시공간을 만들어왔다. 기차 건널목에서 차단기가 내려오면 차를 멈춰야 한다. 그제야 풍경이 보인다. 백일홍을 보고 여름이 온 것을 알게 된다. 정신없이 살다가 만나는 뜻밖의 사건, 일상을 차단하고 사유하게 하는 게 연극이라고 그는 말한다. 부친은 6·25 때 납북됐다. 오태석은 "내가 연극이라는 허구에 천착한 까닭은 그것이 하루아침에 뒤집히지 않는 믿을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상건 박영규 한명구 정원중 김병옥 김세동 김응수 손병호 정은표 성지루 박희순 황정민(여) 임원희 장영남 유해진을 배출한 극단 목화는 배우의 산실이다. 30명에 이르는 식구들이 현실과 마주치지 않고 허구(연극) 속에 머물게 하려면 부지런히 지원 신청을 하고 연습하고 공연을 올려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지불해야 좋은 배우 한 명이 태어난다.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한 배우들은 목화 창단(1984년) 멤버 정진각을 빼면 전부 젊다. 남녀 주인공은 박희순·장영남, 김병철·김문정 때와 비교하면 무르익지 않았고 전체적인 밀도가 아쉬웠다. 신입 단원도 자기 색깔이 생기는 서른다섯 살쯤 되면 떠날 수밖에 없는 게 오태석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50번 바뀌었는데 그는 여전히 이 악물고 달리고 있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우리 단원들이죠. 어떤 조건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시대잖아요. 연극이라는 게 막막한 벌
판인데 안 도망가니까. 허수아비처럼 견디고 서 있는 그 친구들이 고맙죠."

먼지 구덩이 연습실과 극장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는 허수아비들을 그날 목격했다. 언젠가 피어날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송영광 정지영 유재연 조원준 김봉현 배건일 조유진 이신호 임주은 장원준 이병용 이근환 손현우 박현정 박소연 김자연 홍성환 황보연 위다은 최광원 이은주 김차현 김민정.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2/20170612027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