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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빙빙 돌아 바가지 쓰면 어떠하리, 벚꽃 낭만 흩날리는데

최만섭 2017. 4. 15. 09:21

[Why] 빙빙 돌아 바가지 쓰면 어떠하리, 벚꽃 낭만 흩날리는데

  • 이주윤 작가

입력 : 2017.04.15 03:02

[이주윤의 너희가 솔로를 아느냐]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무어냐 물으신다면 주저 없이 '출근'이라 대답하겠다. 낯선 사람들과 몸을 부대껴야만 하는 지하철도, 나도 모르게 경보 선수처럼 뛰듯이 걷게 되는 환승역도, 개찰구를 향해 계단을 오를 때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수백 명의 씰룩이는 엉덩이까지도. 어느 하나 싫지 않은 것이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평생이라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났다. 이 모든 상황이 지겨워 미쳐버릴 지경이었던 어느 날,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내가, 어! 돈 벌어서 말이야, 어! 이럴 때 안 쓰면 또 언제 쓰겠어! 아등바등 고생하는 나를 위해 작은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주윤
"을지로입구요."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목적지만 덜렁 말하는 나에게, 기사님은 어느 길로 가겠느냐 친절하게 물으셨다. 서울에 산 지 십 년이 넘었지만, 늘 지하철만 타고 다닌 탓에 한강을 가로지르는 그 많은 다리가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나였다. 나는 아무 데로나 알아서 가 달라고 대답하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날이 참 좋네요. 벚꽃놀이는 다녀왔어요?" 벚꽃? 벚꼬오오오옻? 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벚꽃은 무슨 벚꽃이람. 기사님의 질문이 귀찮게만 느껴졌다. 나는 시간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피곤해서 잠 좀 자야겠다고, 도착하면 깨워 달라고 말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여의도 쪽으로 해서 어쩌고저쩌고해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갈게요." 기사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알게 뭐야. 말이나 안 걸었으면.'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부르는 기사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벌써 다 왔나? 비몽사몽에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드는데 기사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니, 그게 아니고. 바깥 좀 내다보라고. 벚꽃이 아주 활짝 피었다니까." 택시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꿈이여 생시여. 여긴 어디고 나는 또 누구여.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백미러 속 기사님을 쳐다봤다. "아가씨 벚꽃 보라고 일부러 여의도로 왔어요. 바쁘게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것도 보면서 살아야지. 이 꽃 며칠 못 가서 다 져버린다고."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벚꽃을 바라봤다. 하늘은 파랬고 벚꽃은 하얬다. 예뻤다. 정말 예뻤다. 이렇게 예쁜 걸 여기에 두고 일하러 간다는 게 억울할 만큼이나. 우리는 벚꽃길을 지나 이름 모를 다리를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같은 나였지만 빠른 길을 두고서 멀리 돌아온 것쯤은 알았다. 바가지였다. 아주 낭만적인 바가지.

몇 해 전 일이지만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선명하다. 내 생에 다시 없을 아름다운 날이었다. 바가지를 옴팡 써도 좋으니 그 기사님을 한 번만 더 만났으면 싶다. "아가씨, 올해도 벚꽃 구경 못 했
어요? 여의도로 갈까?" 달콤한 그 목소리가 그립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택시를 타야겠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해봐야겠다. "기사님, 광화문 교보문고 가려고 하는데 여의도 쪽으로 해서 벚꽃 좀 보면서 가면 안 될까요?" 기사님은 호구를 잡았다며 얼씨구나 좋아하실 것이고 나는 마음 편히 벚꽃을 구경하니 나름대로 좋을 것이다. 이 얼마나 흐뭇한 봄날이란 말인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4/20170414018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