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3.27 03:03
[천안함 7주기] 천안함 폭침 생존자 김윤일씨
"가장 바람직한 복수는 굳건히 뭉치는 모습 보여주는 것…
생존자를 패잔병으로 보는 시선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는 "아까 46용사의 영전에 헌화하는 순서에서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았다"며 "해마다 3월이면 먼저 간 46명 전우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고 했다. 7년 전 참사가 자꾸 떠오르는 듯 인터뷰 도중 김씨의 얼굴은 계속 일그러졌고, 말도 자주 끊겼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당시 레이더를 감시하는 전탐병(상병)이던 김씨는 전투상황실에서 레이더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폭음과 함께 몸이 위로 떴고, 몇 초 동안 정신을 잃었다. 구조선으로 옮겨진 그는 "살아남은 전우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배에서 올라와 내 곁으로 올 때, 전사자들을 태운 헬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공포에 떨었다"며 "TV에서 전사자들의 신원이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제발 저들이 고통 없이 즉사했기만을 바랐다"고 했다.
김씨는 사건 이후 10개월 동안 제주방어사령부에서 나머지 군 생활을 보냈다. 그는 "군 복무 기간 전우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며 "한 차례라도 저 잔인무도한 적(북한)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했다. 2011년 1월 전역한 김씨는 동국대 사학과에 복학해 2014년 졸업했다.
전역 이후 김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천안함 생존자들을 '패잔병'으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일부에서는 '경계에 실패한 군인' 운운하며 전사한 천안함 용사들의 희생을 폄하하려 했고, 우리의 주적에게 폭침 혐의가 집중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논란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다만 천안함 생존 장병들에 대한 무관심과 어떤 대책도 제공하지 않는 정부와 국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그는 "나라를 지키다 적의 공격으로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겪어야 했던 자들을 국가가 외면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겠느냐"고 했다.
회사에 취직했다가 최근 퇴사해 쉬고 있다는 김씨는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3월 26일에 생일을 쇤다"고 했다. 1년간 탑승했던 천안함은 그에게 '두 번째 집'이고 전우들은 '두 번째 가족'이라고 했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천우회(천안함 전우회)'를 만들어 활동하며 현충일이나 경조사 때 모여 정(情)과 기억을 나눈다고 한다.
김씨는 올해도 천안함 추모 행사 하루 전인 25일 평택에 내려가 전우들을 만났다. 그는 "전우들을 만나 천안함 폭침 상황 당시 얘기를 나누는데, 사건 당시 모두 다른 위치에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