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사흘 만에 어이없는 메시지
헌재 결정 수용은 최소한의 의무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난 지 오래인 민 의원을 대변인으로 내세워 입장을 표명하고 친박계 한국당 의원들을 자택 앞에 도열시켰다. 이는 한국당을 직접 접수해 자신을 탄핵시킨 비박계·야권과 대결정치를 벌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헌재 선고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92%가 헌재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은 10% 남짓한 지지층을 인질 삼아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며 나라를 두 동강 내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대통령은 국법 수호의 무한책임을 지는 국가 이성의 최고봉이다. 본인이 억울한 측면이 있더라도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지체 없이 승복을 선언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의무다. 나아가 지지층에 자제를 호소하고, 이번 사태로 상처 입은 국민들을 위로해 치유와 화합에 앞장서는 게 전직 국가원수로서 최소한의 도리 아닌가.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 발언도 잊어선 안 된다. 2004년 헌재가 세종시 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곧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헌법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DA 300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보다 전국 득표에서 앞선 데다 플로리다주 개표 논란으로 승리를 주장할 여지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부시의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동의하지 않지만 받아들인다”며 물러났다. 이 퇴임사는 두 쪽으로 쪼개지던 미국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한 결정적 한마디였다.
박 전 대통령이 진정 민심과 역사의 재평가를 받고 싶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헌재의 최종 판단에 승복하면서 검찰수사에 당당하게 응해야만 한다. 박 전 대통령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제 헌재의 판결을 차분하게 기다리고, 그 판결에 대해 찬성했던 사람이나 반대했던 사람이나 겸허히 승복해야 한다고 본다”고 촉구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 발언이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한다는 건 박 전 대통령도 잘 알 것이다. 이제 박 전 대통령은 13년 전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길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