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

[Why] 몰골 구질구질한 날, 옛 썸남과 마주쳤다

최만섭 2017. 3. 4. 08:54

[Why] 몰골 구질구질한 날, 옛 썸남과 마주쳤다

  • 이주윤 작가

입력 : 2017.03.04 03:03

[이주윤의 너희가 솔로를 아느냐]
못 본 척 스쳐지나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곁눈질로 훔쳐봤지
세월의 흔적 비교해가며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몰골 구질구질한 날, 옛 썸남과 마주쳤다
일러스트 이주윤
저기 저 멀리에서 아는 남자가 걸어온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모습이다. 그의 곁에는 그런 그와 잘 어울리는 해사한 여자가 종종걸음을 걷고 있다. 팔짱을 낀 다정한 두 사람이 자꾸만, 자꾸만 가까워져 온다. 나는 세상의 수많은 길을 두고서 왜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하필이면 머리도 감지 않은, 화장은커녕 로션도 바르지 않은,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패딩 점퍼를 덜렁 걸쳐 입은, 멀쩡한 가방 대신 귤이 잔뜩 든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쥔 이런 날에 말이다. 빠져나갈 샛길도, 몸을 숨길 전봇대도 없다. 그렇다고 잘못한 일 하나 없는데 뒤돌아 도망치기도 싫다. 쪽팔려 죽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앞으로 걸어나가는 수밖에. 삼십 초 후면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는 나의 직장 동료였다. 어느 한 군데 못난 구석 없이 밤톨같이 잘생긴 그의 얼굴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나이에 비해 머리숱이 적어 아쉽기는 했으나 어차피 내 남자가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에게 어린 애인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었지만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고 단념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잡스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고, 퇴근할 때는 같은 방향이라면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가 하면, 앞자리에 앉은 내 등을 콕콕 찔러 뒤돌아보면 말없이 싱긋 웃는 데다가, 늦은 밤 용건 없이 전화를 걸어 잠든 나를 깨우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를 좋아하느냐고.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랑 바람이라도 피우고 싶으세요?" 화들짝 놀란 그는 나에게서 도망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 저기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해사한 여인이 그의 아내일 테지. 만약 내가 그에게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저 여자가 아닌 내가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지금 그의 손을 붙잡고서 이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용기가 부족해서,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해서,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붙잡아 두는 방법을 몰라서 아직까지 혼자인 것일까? 아니다. 용기 내지 않기를 잘했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의 일을 대신 해주고, 누군가를 집에 바래다주며, 누군가를 보며 미소 짓고, 누군가에게 전화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애인을 두고서 나에게 그랬던 그때처럼. 그런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내게는 없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서로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봤겠지. 나의 기름진 머리와 잡티가 선연한 민얼굴과 후줄근한 옷차림을. 며칠째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쉰내는 당연히 맡았을 터인데, 제기랄…. 내가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그와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 것처럼, 그 역시 구질구질한 내 몰골을 보고 나에게서 도망치길 잘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흥, 그래라. 나도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봤다, 뭐. 이까짓 머리, 나는 감으면 그만이야. 근데 너는 없는 머리 더 빠진 거, 그거 어떡할 건데, 응? 어떡할 거냐고! 쌤통이다. 내가 이긴 거야. 울지 말자. 울지 말자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03/20170303016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