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무대는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잘할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루지 못한 것을 자책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 자신에게 격려와 선물을 준비해보자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어보자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즈음이면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와 친구들은 얼마나 바빴던지. 하얀 마분지와 색연필과 반짝이 펜을 사와 머리를 맞대고는 카드를 만드느라 밤을 새웠다. 전나무와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내려 덮인 눈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루돌프 썰매를 세밀화가라도 된 듯 그려 빨강과 초록으로 채색하고 아껴가며 반짝이를 덧칠하다 보면 겨울 새벽이 희끄무레 밝아왔다. 거의 한 동네 살았던 친구네를 돌며 낮은 담 너머로 하얀 봉투를 던지고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눈부시고 설레었던가. 그 순수의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그 아이가 이미 내 안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성탄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조명 장식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의 들뜬 표정이 세모의 추위를 녹여주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유독 올해만의 일은 아니다.
김애란은 단편소설 '성탄특선'에서 돈 없는 연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역병처럼 다가온다고 선언했다. 사랑하기 위해선 사랑보다 돈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알바' 세대에게 크리스마스는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청춘을 지난 사람들은 뾰족하게 해놓은 것 없이 또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사실 앞에 소리 없는 비명을 조용히 삼킬 뿐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룻밤 묵을 방을 찾아 추운 거리를 헤매는 사이 둘 사이의 다정함과 설렘마저 차갑게 식어내리고 결국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성탄특선'의 연인들보다 더 가혹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 사람이 있긴 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스크루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린 나에게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각인시킨 인상적인 동화였다. 그 자신이 산업혁명의 그늘에서 비참한 소년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디킨스는 그 체험을 세밀히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가가 되었다. 이 작품 역시 발행 당일 완판될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후 세 시면 어스름이 내리는 춥고 음산한 안개 속 런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동화라기보다는 공포소설이었다. 수전노 스크루지의 친구였던 말리는 절거덕거리는 쇠사슬을 친친 감고 턱뼈가 쑥 빠져 내린 끔찍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난다. 유령인 말리의 손에 이끌리어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 스크루지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는데…. 어릴 적 읽었던 거친 요약본이 워낙 강렬해서 다 아는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원본으로 다시 읽어보니 풍성한 세부 묘사와 생동감 있는 대사 덕분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스크루지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그런 의미들을 짚어보니 어린이보다는 어른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었다.
왜 크리스마스는 한 해의 마지막에 있는 것일까.
미셸 투르니에는 사람의 뒷모습에 진실이 있다고 했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누군가의 등은 인색함과 비열함을 후광처럼 두르고 있을 것이다. 어떤 어깨는 지친 듯 기울어져 있을 것이고, 어쩐지 안쓰러운 뒷모습도 있을 것이다.
자책하진 말자. 인생이란 무대는,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지나고 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없겠지만 올해는 유독 더했다. 온 나라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이 총성 없는 전쟁은 언제 끝날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 싶은 날들이다.
수전노란 꼭 타인을 향한 냉담이나 인색만을 일컫는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러니 가까운 이에게 행복을 빌어주고, 새해의 복을 기원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 역시 이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