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1.24 03:04
우리를 절망케하는 가난·실패·암이 지독한 악마마저 끌어안으면
곧 은혜로운 천사가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데
지위, 신분, 재산이 뭐라고 저 난리들인지…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주임신부](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11/23/2016112303295_0.jpg)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11/23/2016112303295_1.jpg)
20여 년 전 꼭 이맘때 익산의 한 나환우 정착촌에서 살 때다. 성탄 전 4주 대림 피정이 끝나는 날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나는 물었다. "여러분 중에 혹 자신의 병을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 순간, 나는 그때 성당의 분위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싸늘하고 적막하고 엄숙했던지. 잠깐의 그 적막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던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사실 그녀는 시력을 잃었다―혼잣말처럼, 그러나 차분히 고백했다. "네, 이 몹쓸 병은 나에게 큰 은총이지요." 그러자 "맞아요. 은총이죠" "은총이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그 미사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른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간신히 그 미사를 마쳤다. 성당을 나오는데 한 자매가 수줍은 듯 다가와 속삭였다. "신부님, 이 몹쓸 병은 저에게 큰 은총이죠. 이 몹쓸 병이 아니었으면 나, 이 좋으신 하느님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은총이죠. 은총이에요." 핏기 없는 피부에 그냥 그려놓은 눈썹이 무척 고왔다. 그 고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늦가을 파아란 하늘, 벌거벗은 감나무에 매달린 빠알간 홍시, 너무도 아름답다. 그 많던 감잎이 그냥 바닥에 다 누웠다. 자기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잎사귀가 다 죽었다고? 아니다. 한 잎 예외 없이 저 빨간 홍시 속에 다 농축돼 살아있다. 하여 때가 되면 다시 산다. 황금빛 들녘이 빈 들이 되었다. 나락이 다 죽었다고? 천만에 한 톨 볍씨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때가 되면 다시 산다. 때가 되어 그 모습이 바뀔 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으니 나도 곧 죽는다고? 아니다. 암도 나병도 심지어 죽음도 앗아갈 수 없는 생명―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이토록 힘차게 자라고 있는데 죽어 사라지다니, 틀린 얘기다.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난, 실패, 암, 나병 등 우리 인간을 절망하게 하는 이 지독한 악마들. 그런데 이 악마들마저도 끌어안고 입 맞추면 곧 아름답고 은혜로운 천사가 되어 이 죄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