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9.08 03:11
나라와 민족 위해 제 뼈 살을 깎았던 선배 주필들이 작금의 추문을 보고 통곡했을 것
할 말은 하되 말할 자격 있는지 항상 되돌아볼 것
독자들께 엎드려 용서 구합니다
조선일보 2대 주필은 민세(民世) 안재홍 선생이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사설과 시론을 집필한 열정적 기자였던 선생은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모두 9차례 도합 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그 추운 함경남도 감옥에 마지막으로 석 달여간 수감된 이후엔 생명이 얼마 남지도 않은 듯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감방 온도는 보통 영하 20도 정도였고 일제는 선생을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하게 했다. 같이 투옥된 두 사람은 감옥에서 죽었다. 해방 후 자주 민족국가를 세우려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6·25 때 납북되어 1965년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조선일보 주필실 입구엔 안 선생을 필두로 한 역대 주필 모두 열일곱 분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홍종인·최석채·선우휘 등 모두 당대 최고 언론인이었다. 왜 주필실 안이 아니라 문밖 작은 복도에 사진이 걸려 있는지 의아했던 적이 있다. 주필만이 아니라 논설위원 모두가 드나들어야 하는 그곳에서 그 어른들의 시선을 매일 매 순간 느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선배 주필들은 100년이 다 되어가는 긴 세월 동안 때로는 자부심으로 때로는 실망으로 후배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배들의 기자 정신만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란 믿음으로 그 좁은 복도를 걸었다.
최근 조선일보 전 주필이 추문에 휩싸여 사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필자는 갑작스레 논설 책임을 맡게 됐다. 어디를 갔다가 논설실로 들어오다 우연히 안재홍 전 주필의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들기 어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살을 깎고 제 뼈를 부순 선배 앞에서 '기자 정신'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게 된 후배는 도망치듯 그 사진 앞을 지나쳤다. '나와 우리 잘못으로 저 선배들의 충정(衷情)까지 먹칠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통곡이 들리는 듯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자 정신은 단 하나의 일화에 응축돼 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권력의 압박으로 기사를 쓰지 못했다. 기자들이 사찰당하고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얻어맞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선우휘 주필이 혼자 논설실에 나타나 사설(社說)을 썼다. '요즘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다'는 글로 시작한 사설은 납치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선우 주필은 야근자들에게 윤전기를 세우라고 지시하고 사설을 갈아 끼웠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필로서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밤중 사설 교체를 발행인인 사장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세상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가 신문을 수거하려 했지만 이미 상당수가 배달됐다. 선우 주필은 검거령 속에 신문사로 사표를 보내왔다. 당시 사장이었던 방우영 전 고문은 회고록에서 '그 사설을 미리 보았다면 싣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기자 정신이 없었다면 그 사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유신도 중앙정보부도 없다. 그러나 권력은 여전히 있다. 대통령 권력뿐이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야당도 권력이고 기업도 권력이다. 노조나 시민단체도 권력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라도 할 말은 하는 기자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언론의 생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론도 권력이라고 한다. 언론 권력이란 말이 생긴 자체가 심각한 일이다. 영향력이 크다고 권력이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의 영향력을 권력적으로 누려왔으면 언론 권력이다. 언론이 권력이면 기자 정신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 증상이 조선일보에서, 그것도 주필에게서 드러났다. 참담할 따름이다.
과거 여러 조선일보 주필이 권력으로부터 해임 압력을 받았다. 내사당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어느 정권 때는 수사기관에 불려간 기업인들이 '조선일보 주필에게 돈 준 것만 불면 봐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논설을 쓴 데 따른 보복이었다. 그런 보복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한다. 하지만 언론을 권력처럼 누리다 독자를 실망시킨 초유의 사태 앞에서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김영란법이 '5~10년 전에 실시됐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지 않고, 인허가권도 없는 기자들이 왜 공무원 규제법 적용을 받느냐"고 항변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 사태를 겪고서 기자들이 먼저 이 법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잘만 정착되면 우리 사회 전체를 바꿀 수 있다. 자연스레 '언론 권력'이라는 치욕스러운 말도 없어질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할 말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도 항상 돌아보겠습니다.' 선배 주필들과 독자들께 엎드려 드릴 수 있는 약속은 이것뿐이다.
조선일보 주필실 입구엔 안 선생을 필두로 한 역대 주필 모두 열일곱 분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홍종인·최석채·선우휘 등 모두 당대 최고 언론인이었다. 왜 주필실 안이 아니라 문밖 작은 복도에 사진이 걸려 있는지 의아했던 적이 있다. 주필만이 아니라 논설위원 모두가 드나들어야 하는 그곳에서 그 어른들의 시선을 매일 매 순간 느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선배 주필들은 100년이 다 되어가는 긴 세월 동안 때로는 자부심으로 때로는 실망으로 후배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배들의 기자 정신만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란 믿음으로 그 좁은 복도를 걸었다.
최근 조선일보 전 주필이 추문에 휩싸여 사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필자는 갑작스레 논설 책임을 맡게 됐다. 어디를 갔다가 논설실로 들어오다 우연히 안재홍 전 주필의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들기 어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살을 깎고 제 뼈를 부순 선배 앞에서 '기자 정신'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게 된 후배는 도망치듯 그 사진 앞을 지나쳤다. '나와 우리 잘못으로 저 선배들의 충정(衷情)까지 먹칠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통곡이 들리는 듯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자 정신은 단 하나의 일화에 응축돼 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권력의 압박으로 기사를 쓰지 못했다. 기자들이 사찰당하고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얻어맞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선우휘 주필이 혼자 논설실에 나타나 사설(社說)을 썼다. '요즘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다'는 글로 시작한 사설은 납치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선우 주필은 야근자들에게 윤전기를 세우라고 지시하고 사설을 갈아 끼웠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필로서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밤중 사설 교체를 발행인인 사장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세상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가 신문을 수거하려 했지만 이미 상당수가 배달됐다. 선우 주필은 검거령 속에 신문사로 사표를 보내왔다. 당시 사장이었던 방우영 전 고문은 회고록에서 '그 사설을 미리 보았다면 싣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기자 정신이 없었다면 그 사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유신도 중앙정보부도 없다. 그러나 권력은 여전히 있다. 대통령 권력뿐이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야당도 권력이고 기업도 권력이다. 노조나 시민단체도 권력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라도 할 말은 하는 기자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언론의 생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론도 권력이라고 한다. 언론 권력이란 말이 생긴 자체가 심각한 일이다. 영향력이 크다고 권력이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의 영향력을 권력적으로 누려왔으면 언론 권력이다. 언론이 권력이면 기자 정신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 증상이 조선일보에서, 그것도 주필에게서 드러났다. 참담할 따름이다.
과거 여러 조선일보 주필이 권력으로부터 해임 압력을 받았다. 내사당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어느 정권 때는 수사기관에 불려간 기업인들이 '조선일보 주필에게 돈 준 것만 불면 봐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논설을 쓴 데 따른 보복이었다. 그런 보복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한다. 하지만 언론을 권력처럼 누리다 독자를 실망시킨 초유의 사태 앞에서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김영란법이 '5~10년 전에 실시됐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지 않고, 인허가권도 없는 기자들이 왜 공무원 규제법 적용을 받느냐"고 항변하는 말을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할 말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도 항상 돌아보겠습니다.' 선배 주필들과 독자들께 엎드려 드릴 수 있는 약속은 이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