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배우고 빠져드는 것은 호수를 건너는 일과 같아
가장자리만 돌며 헤엄치면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어
상투성에 갇히기 쉬운 삶을 긴장 속으로 밀어넣어야
![김기석 청파교회 담임목사 사진](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5/31/2016053103596_0.jpg)
데버러 스미스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줌파 라히리가 떠올랐다. 런던의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축복받은 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등의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기가 글을 쓰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고, 자기 자신을 견뎌내고,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 그것이다. 영어는 그런 글쓰기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지만 너무나 익숙하기에 가끔은 작가를 타성에 빠뜨리기도 했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다른 언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한다. 어휘와 용례를 하나하나 익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는 살아 있음의 희열을 느낀다. 이탈리아어는 그에게 완벽함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불완전할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익히고 그 낯선 언어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책에 담아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5/31/2016053103596_1.jpg)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호수를 건너는 일에 빗대 설명한다. 호수 가장자리만 빙빙 돌며 헤엄을 치면 결코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 호수를 가로지르는 용기를 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심연은 더욱 큰 공포가 되어 우리 삶을 잡아당기지 않던가. 줌파 라히리는 익숙한 언어를 잠시 떠나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갔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언어 선택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사물과 세상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낯선 언어,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투성 속에 갇히기 쉬운 삶을 긴장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성경은 온통 '떠나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은 친족들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던 고향을 떠나 낯선 세계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낯선 세계는 언제라도 증오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세상은 내부에 응축된 폭력의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공동의 적을 만들곤 한다. 어느 시대든 외부자들은 그러한 증오의 표적이 되기 쉽다. 언어, 피부색, 종교, 습속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취약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자고 하나님은 택하신 이들에게 익숙한 땅을 떠나라 하시는 것일까?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닐까? 떠남은 특정한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떠남은 타성에 젖은 생각이나 입장,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버릇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며칠 전 이 땅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중국 교포로부터 자기들의 이질적인 억양 때문에 자녀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차이가 쉽게 차별로 환치되는 사회, 동일화의 폭력이 암암리에 작동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이다.
신앙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종교적 앎은 교만으로 귀착되거나 타자에 대한 배타성으로 변하곤 한다. 고백과 삶의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