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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아버지 찾아가던 봄날엔

최만섭 2016. 5. 17. 21:15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아버지 찾아가던 봄날엔

한 달 만에 나선 문병길
삼키는 법을 잊은 아버지는 배에 호스 꽂아 죽을 드시네
재활치료 중단한 지 오래
봄 햇살 이리도 따사로운데 당신 몸에도 새순이 돋을까

김윤덕 문화부 차장
김윤덕 문화부 차장
아버지 찾아가던 봄날엔 산철쭉이 흐드러졌다. 한 달 만의 문안이었다. 거래처 부장 카톡에 긴 댓글 다느라,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친 딸은 병중 아버지보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한 자기 처지가 한심해 씁쓸히 웃었다.

6인용 병실엔 라디오 소음이 둥둥 떠다녔다. 귤색 유니폼을 입은 조선족 간병인들은 아직 기력이 남은 환자들에게 밥을 떠먹이며 농담 따먹기를 했다. 목에 턱받이를 두른 채 고분고분 받아먹는 환자를 그들은 사랑했다. 입 꼭 다물고 밥투정이라도 할라치면 "이 양반, 또 앙탈이시네" 하며 눈을 부릅떴다. 한때 교수였고, 한때 검사였으며, 한때 사장 소리 듣던 남자들도 이곳에 오면 푸른 줄무늬 옷 평등하게 입은 환자가 됐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간병인 하나가 흥얼거렸다. '눈부신 기억들은 반짝이는 불빛이 되어 나의 화려한 날은 가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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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위 아버지는 딸을 알아보지 못했다. 발끝으로 침투해 목까지 점령해 올라간 병마는 한때 세상을 향해 겁 없이 호통치던 사내에게 말 한마디,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허(許)하지 않았다. 벌써 3년째. 이미 굳어버린 팔과 다리를 무심히 주무르던 딸은 입천장으로 혀를 둥글게 말아 올린 아버지가 꼭 갓난아기 같다고 생각했다. 허옇게 각질이 인 노인의 두 귀에 이어폰을 끼워 드렸다. 찬송가밖에 모르던 구식 남자가 따라 부를 줄 알던 유일한 '세상 노래'였다. 하모니카 잘 불던 이 가수가 스스로 생을 접었을 때 아버지는 "바보 같은 사람" 하시며 혀를 찼다. 마른 장작개비처럼 뻣뻣한 아버지 몸속으로 노래와 함께 갈색 죽이 흘러들어 갔다. 삼키는 법을 잊은 환자의 위(胃)에 의사가 작은 구멍을 내어 호스를 끼우던 날 그의 늙은 아내는 숨죽여 울었다. 방울방울 눈물처럼 떨어지는 죽이 아버지 생명줄이었다. 약봉지를 나눠주러 온 간호사는 "재활 치료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며 돌아섰다. 그 말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아버지 찾아가던 봄날엔
/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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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그날도 어김없이 병실로 들어섰다. 옆 침대에 누운 노인의 외아들이다. 코에 산소호흡기를 단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환자는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는 간병인들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다. 마흔을 갓 넘겼을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실에 온다는 아들은 새 생명을 불어넣고야 말겠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아버지의 몸을 주물렀다. 지난겨울 일본 출장길에서도 저렇게 작고 서글픈 등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이름 없는 옻칠 장인(匠人) 집에서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면 아들은 그걸 나무에 새기고, 아버지는 그 위에 붉은 옻칠을 했다. 같은 방에서 작업하는데도 부자(父子)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도쿄에서 대학 나와 큰 회사 다니던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며 낙향한 것에 실망한 아버지는 종일 아들에게 등을 돌린 채 일을 한다고 했다. "아들이 나처럼 살기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아들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언젠가는 받아주시지 않을까요? 못나도 당신 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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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은 63년을 살다 기세(棄世)한 아버지가 때때로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고 적었다. 두어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왔다가 다음 날 또 어디론가 사라지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미워했지만, 아들은 아버지 누운 건넛방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방을 덥혀 드렸다고 했다. 카프카는 반대였다. 남들에겐 더없이 친절하고 관대하지만 아들과 가족한테는 독재자처럼 행세한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들만 보면 나약하고 어리석다고 힐난하는 아버지 탓에 우울증까지 걸린 카프카는 '아버지는 내가 나 자신을 불신하도록 가르쳤다'고 썼다. 그 고집불통 아버지들이 '철들기' 시작했을 때 병마도 함께 찾아왔다. 작가 윤용인은 자신의 책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데 사십 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후 아버지 무덤 앞에서 시대를 잘못 만나 날개 한 번 펼치지 못한 한 남자의 불우한 삶에 소주를 올렸다'고 썼다.
  • 기세5 (棄世)

    [명사]

    • 1.세상을 버린다는 뜻으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이르는 말.
    • 2.세상을 멀리하여 초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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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처럼 딱딱해진 아버지의 손톱을 깎아 드린 뒤 병실을 나선다. 다음 생엔 바람으로 태어나리라, 하셨던가. 봄 햇살 이리도 따사롭고 , 산벚나무 잎새는 저리도 푸른데, 내 아버지 몸에도 다시 새순이 돋을까.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던 딸이 아직 아버지 온기가 남아 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나직이 읊조리던 그 노랠 들으며 딸이 운다. '너의 길, 너의 어둠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다'던 젊은 날의 그 건장했던 사내를 떠올리며, 다 늙은 딸이 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