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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의 꽃이야기] 만발한 홍자색 박태기꽃, 박완서가 그립다

최만섭 2016. 4. 28. 11:42
[김민철의 꽃이야기] 만발한 홍자색 박태기꽃, 박완서가 그립다

소설 속에 꽃 많이 나오고 정확
박태기꽃으로 시골처녀의 떨림, 능소화로 '팜파탈' 여인 묘사
위선·허위엔 가차 없는 시선, 꽃은 한없는 애정으로 특징 포착
맏딸 "꽃 필 때 가장 그리워"

김민철 논설위원 사진
김민철 논설위원
요즘 화단이나 공원에서 온통 홍자색으로 물든 나무를 볼 수 있다. 잎도 나지 않은 가지에 길이 1~2㎝ 정도 꽃이 다닥다닥 피기 때문에 나무 전체를 홍자색으로 염색한 것 같다. 박태기나무꽃이다. 4월에 물이 오르면 딱딱한 나무에서 꽃이 서서히 밀고 올라와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신기하다. 벌써 꽃이 시들면서 심장형 잎이 나온 나무도 있다. 나무 이름은 꽃이 피기 직전 꽃망울 모양이 밥알을 닮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어릴 적 필자 고향에서는 밥알을 '밥태기'라고 불러서 이 나무 이름을 듣고 금방 수긍할 수 있었다.

이 화려한 꽃을 볼 때마다 박완서의 단편 '친절한 복희씨'가 떠오른다. 이 소설만큼 박태기나무꽃의 특징을 잘 잡아내 묘사한 소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지금은 중풍으로 반신불수인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 이야기다. 할머니는 꽃다운 열아홉에 상경해 시장 가게에서 일하다 홀아비 주인아저씨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그런 할머니에게는 가게에서 식모처럼 일할 때, 가게 군식구 중 한 명인 대학생이 자신의 거친 손등을 보고 글리세린을 발라줄 때 느낀 떨림의 기억이 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나는 내 몸이 한 그루의 박태기나무가 된 것 같았다. 봄날 느닷없이 딱딱한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직접 진홍색 요요한 꽃을 뿜어내는 박태기나무. 내 얼굴은 이미 박태기꽃 빛깔이 되어 있을 거였다. 나는 내 몸에 그런 황홀한 감각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를 어쩌지. 그러나 박태기나무가 꽃피는 걸 누가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떨림을 감지한 대학생은 당황한 듯 내 손을 뿌리쳤다.'

버스 차장을 목표로 상경한 순박한 시골 처녀가 처음 느낀 떨림을 박태기꽃에 비유해 어쩌면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작가가 새봄마다 애정을 갖고 박태기나무를 보았기에 '딱딱한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같은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작가가 1998년부터 2011년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구리시 아차산 자락 이층집엔 박태기나무도 자라고 있다.


*가장귀-나무가지갈라진 부분. 또는 그렇게 생긴 나뭇가지.


박태기
박태기나무만이 아니다. 박완서는 꽃을 주인공에 이입(移入)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람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에는 가차 없는 시선을 보내지만, 주변 꽃은 한없는 애정으로 바라보며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눈이 아프도록' 꽃을 바라보는 스타일이라면, 박완서는 꽃을 그리 길지 않게 묘사하고 지나가는 것이 단숨에 특징을 잡아내는 스타일인 것 같다.

능소화
작가의 다른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는 능소화가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 영빈은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현금을 만나 외도를 한다. 현금은 어릴 적 이층집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로 뒤덮었다. 현금이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능소화는 이 소설에서 현금처럼 '팜파탈' 이미지를 갖는 화려한 꽃이다.
  • '팜파탈-팜므파탈 [femme fatale] 신어
    • [같은 말] 요부(妖婦).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팜파탈’로 적어야 한다.



싱아

 

때죽나무

 

꽈리
  다른 예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는 새콤달콤한 여러해살이풀 싱아가 여덟 살 소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는 실내 관엽식물인 행운목 꽃으로 죽은 자식을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아픔을 드러내는 식이다. '그 남자네 집'에선 성신여대 근처 한옥을 기웃거리다 보리수나무를 보고 50년 전 첫사랑의 집임을 확신하고, '거저나 마찬가지'에선 여주인공 영숙이 하얀 꽃 만개한 때죽나무 아래에서 실속을 못 챙기는 기존 삶의 태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작가가 산책을 다닌 아차산에는 때죽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또 '그 여자네 집'에서는 꽈리가 연인을 지키는 '꼬마 파수꾼의 초롱불'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박완서가 포착해 문학적인 생명력까지 불어넣은 꽃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지만 주목하지는 않은 것들이다.

작가의 맏딸 호원숙씨는 "엄마는 꽃을 너무 좋아하셔서 글 쓰는 것만큼이나 마당의 꽃 가꾸기에 정성 과 시간을 쏟으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인들에게 "우리집 마당에 꽃이 백 가지가 넘는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물론 넓지 않은 마당이라 자잘한 꽃까지 포함한 숫자였다. 호씨는 "엄마와 함께 꽃시장에서 꽃을 사다 가꾸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엄마는 꽃이 핀 걸 보면 항상 '얘, 와서 봐라' 하시곤 했다"며 "꽃이 피었을 때 엄마가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