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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한 달 만에 독파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50권

최만섭 2016. 4. 20. 11:43

ESSAY] 한 달 만에 독파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50권

80년대 초 대학가 술자리 토론… 밤새 책 읽고 공동체 미래 논해
독서열로 선진국 진입한 우리나라… 대한민국 미래는 도서관에 있어
그 길로 이끄는 것이 5070세대의 시대적 책무임을

강원국 前 청와대 연설비서관·전북대 초빙교수
강원국 前 청와대 연설비서관·전북대 초빙교수
아버지가 책을 사왔다.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벽돌색 책 등에 제목은 은박인가, 금박인가 입힌 무려 50권짜리 전집이다. '소공자' '십오 소년 표류기' '서유기' 등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1970년대 초에는 단행본이 별로 없었다. 외국 책을 번역한 전집류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책을 외판원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팔았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아는 이의 읍소와 강권에 못 이겨 떠맡아 왔다.

열 살 갓 넘은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런 방대한(?) 물건을 소유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 1원만'을 입에 달고 살던 때였다. 족히 몇천원은 됨직한 물건을 끼고 쓸고 다듬기를 며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무슨 곡절인지 아버지가 책을 반품하겠단다. 대신 한 달간 말미를 줬다.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한시가 급해 밤낮없이 읽었다. 에리히 프롬 말대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서 존재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인간은 위기에 처할 때 초인적 힘을 발휘한다고 하지 않든가. 시험 볼 때 책상 위의 것 집어넣으라는 감독 선생님 불호령에 가방에 책을 집어넣으면서 일주일 공부할 분량을 읽어내듯 한 달 만에 쉰 권을 독파해냈다. 내 생애 최초의 독서는 이렇게 극적으로 이뤄졌다. 그때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더라면, 그래서 책을 반품하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이모 댁에 얹혀살았다. 내 방은 이모부 서재였고, 이모부는 시인이었다. 책 무게 때문에 이층 양옥이 내려앉는다고 이모가 걱정했다. 그럼에도 날로 책이 늘어났다. 사방 벽이 점점 좁혀 들어왔다. 언젠가 내 잠자리까지 침범해 들어올 듯했다. 내게 책들은 단지 벽이었고 침입자였다. 어느 날 책이 말을 걸어왔다. 이유는 단 하나. 심심해서였다. 무료함이 나를 책장 앞에 서게 했다. 방에 TV가 없었다. '여로'와 김일 레슬링 외에는 안방 TV를 기웃거릴 수 없었다. 물론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었다. 방안에는 덩그러니 책과 나만 있었다. 매일매일이 그랬다. 이상은 수필 '권태'에서 되새김질만 하는 소와 짖지 않는 개, 끝없이 펼쳐진 신록이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했지만, 내 무료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책 저 책을 더듬더듬 펼쳐봤다. 심심함을 떨쳐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웬걸. 놀라운 세상을 발견했다. 김동인 '감자', 나도향 '물레방아' 같은 중·단편소설 곳곳에 낯뜨거운 장면이 출몰했다. 고작 해야 국어사전을 통해 여체의 신비를 풀고 있던 내게 그곳은 경이로운 신천지이자 성적(性的) 해방구였다.

[ESSAY] 한 달 만에 독파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50권
/이철원 기자
나는 마침내 제목만 보면 야한 책을 감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 박범신 '죽음보다 깊은 잠', 김주영 '우산 속의 세 여자', 최인호 '불새'를 찾아냈다. 이뿐만 아니라 목차만 봐도 야한 장면을 찾아내는, 효율적인 독서 감각을 갖추게 됐다. 이 모두가 권태라는 기름진 토양 위에서 피어났다. 요즘같이 바쁘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겐 심심할 틈이 있을까.

80년대 초 대학에 갔다. 전공 공부 열심히 하고 고시 준비하는 것이 부끄러운 때였다. 당연히 '토익'이나 '스펙'이란 말도 주변에 없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지 않고 김남주 시를 모르면 대학생이 아니었다. 낮에는 집회에 참석하고 저녁엔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선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난무했다. '사회구성체론' '종속이론' '해방신학'. 책을 읽지 않으면 자리에 낄 수 없었다. 아는 게 없어 한마디도 거들지 못한 날에는 자괴감이 들었다. 집에 가서 책을 읽으면서 술자리 토론을 준비했다. 다음 날에는 전날 밤 읽은 내용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불의한 시대였다. 대학생 누구나 부채 의식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대학 4년이 흘렀다.

돌아보면 시대가 책을 읽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사는 게 가능했던 마지막 세대다. 그다음은 그렇게 빈곤하지 않았다. 심심할 틈도 없었다. 술 마시며 역사와 공동체의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 읽을 일도 없어졌는지 모른다.

다니던 출판사를 올해 그만뒀다. 매일 동네 도서관에 나간다. 종일 책 읽는 생활이 즐겁다 . 밥도 싸고 맛있다. 취미로 하는 독서가 아니다. 앞으로 15년 후면 우리 국민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인구도 감소세로 돌아선다. 사람밖에 없는 우리나라다. 부모의 교육열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부턴 독서열로 선진국에 진입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도서관에 있다. 그 길로 이끄는 것, 5070세대에 맡겨진 마지막 시대적 책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