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기자의 시각] 국민이 사랑한 스파이

최만섭 2016. 3. 23. 21:32

[기자의 시각] 국민이 사랑한 스파이

입력 : 2016.03.22 09:32

노석조 예루살렘 특파원
"인터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달 초 이스라엘 대외첩보부 모사드 메이어 다간 전(前) 국장의 비서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이슬람국가(IS)의 계속되는 테러 위협·북의 핵 도발로 인한 한반도의 위기 등 안보 문제에 대해 다간 국장의 고견을 듣고자 인터뷰 신청을 했는데 '승낙'의 답장이 온 것이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를 이유로 "대면 인터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다간은 2012년 간 이식 수술을 받고 이듬해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회복했으나, 암이 재발하면서 최근 텔아비브의 한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서면 인터뷰'는 안 되는지 물었는데, 다음 날 "질문 세 가지만 적어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질문지를 정리해 다간의 비서에게 전송했다. 서너 시간 뒤 '수신 확인' 기능을 사용해 살펴보니 '메일 읽음' 표시가 돼 있었다. 다간의 답장이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았다. 하지만 다간의 답장은 열흘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다간 측과 오래 연락을 주고받던 한 인사는 "하지 않을 인터뷰였으면 질문지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면서 "말 못 할 이유가 있어 답장이 좀 늦어지는 듯하다"고 했다.
이스라엘 대외첩보부의 모사드 메이어 다간 前 국장. /AP 연합뉴스
그러던 지난 17일 아침 휴대폰으로 쪽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다간 사망.' 이어 다간과의 인터뷰 추진 상황을 알고 있던 이스라엘 총리실의 공보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간이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하려고 펜을 들고 몇 자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득 '다간이 답지를 쓰려고 했다면 어떤 메시지를 한국에 주려고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인터뷰 기사 대신 그의 부음을 썼다. 현지 언론이 내놓는 평가, 주요 인사들의 애도사를 보니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그에 대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라며 호평했다. 거리에선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총리나 대통령이 아닌 퇴임 5년이 지난 정보기관의 옛 수장이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에 대한 국민의 마음은 모사드라는 정보기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진보 언론 하레츠는 "다간은 자신을 임명한 총리와도 의견 대립을 할 정도로 모사드를 초당파적 조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해 국민의 신뢰를 끌어냈다"고 했다. 그는 이란 핵시설을 전투기로 파괴해야 한다는 총리의 주장에 확전 위험이 크다고 반대하면서도 악성 바이러스를 이용해 이란 핵 시설을 마비시키는 성과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 다간은 이 같은 모사드의 모토를 가리키며 "정보기관이 여론을 많이 의식하는 정치인의 수단이 되면 나라가 위험에 빠진다"고 경계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보기관을 흔들려는 시도가 반복되며 정보전 수행 능력을 허물어 온 게 우리 풍토다. 다간과 같은 지략을 지닌 정보 수장이 없었던 것도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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