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강천석 칼럼] 헌법 속 '다리 달린 뱀'의 化石 강천석 논설고문

최만섭 2016. 3. 19. 11:13

[강천석 칼럼] 헌법 속 '다리 달린 뱀'의 化石

입력 : 2016.03.18 23:14 | 수정 : 2016.03.18 23:16

집권당 몽땅 허물고 새로 지으려 하면 공연한 의심 불러
현직 대통령 최고 자랑, 퇴임 대통령 최고 방패는 오직 업적뿐

강천석 논설고문 사진
강천석 논설고문

우리 헌법에는 '뱀의 다리' 같은 조항이 있다. 이 사족(蛇足)이 헌법 90조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 조항이다. 90조 1항은 '국정 중요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국가 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고 했다. 2항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 다만 직전 대통령이 없을 때는 대통령이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지명한다'고 돼있다. '다리 달린 뱀'의 헌법 화석(化石)에는 권력을 놓아야 하는 권력자의 불안과 그것이 불러온 파란(波瀾)의 역사가 깊이 패어 있다.

당시 입 달린 사람들은 이 조항을 놓고 민주주의에 어긋난 상왕(上王) 규정이라 해서 말이 많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람들은 세간의 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맡고 있던 '측근 중의 측근'이 핵심이었다. 이 인물은 요즘의 '진실한 사람'들과는 유(類)가 달랐다. 그는 훗날 모시던 보스를 대신해 세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리면서도 이마를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대통령 임기 종료 직전 헌법 90조를 디딤돌 삼아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을 제정하고 퇴임 대통령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근거지로 삼기 위해 막대한 기금(基金)을 보유한 재단도 설립했다.

후일담(後日譚)을 들어야 현행 대통령제가 어떻게 '뱀의 다리'를 떼게 됐는지 알 수 있다. 퇴임 대통령은 친위(親衛) 세력이 깔아놓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으나 얼마 안 가 국회 청문회 증언대에 서고 그 겨울 강원도 인제 땅 백담사로 유배(流配)됐다. 그때 백담사는 덜컹거리는 비포장(非鋪裝) 도로를 몇 시간 달려야 닿는 막막한 곳이었다. 노(老)스님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그 거처마저 얻지 못할 처지였다.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은 제정된 지 1년 만에 폐기(廢棄)됐고 헌법 90조는 사문화(死文化)됐다. 헌법에는 '다리 달린 뱀'의 화석만 남게 됐다. 87년과 88년 사이 우리 헌법과 정치 소사(小史)다.

이런 배경에는 3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가 당시 대통령의 전죄(前罪)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지휘했고 대통령 재임 시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과욕(過慾)이다. 퇴임 후에도 현직 대통령과 권력을 나눠 가지려 했다. 후계자를 지명하고 그가 대선에 승리할 수 있도록 정치 각본과 선거 자금을 제공했기에 그게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퇴임 대통령을 백담사로 떠민 건 반대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현직 대통령이었다. 현직에게 전직(前職)의 그림자만큼 부담스러운 짐이 없다. 셋째 요인은 친위 세력을 든든한 울타리로 착각한 오판(誤判)이다. 현직의 햇볕이 내리쬐는 순간 전직의 친위 세력은 눈 녹듯 녹아 버리고 만다.

지금 새누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천 막장 드라마를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혼자 작품으로 볼 만큼 눈이 어두운 사람은 없다. 관심은 대통령의 의도(意圖)가 무엇이냐는 쪽으로 쏠려 있다. 대통령의 남은 임기 2년을 뒷받침할 원내 다수 의석을 확보하려는 뜻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그 원내 다수가 왜 '대통령에게만 진실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은 소속 정당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과객(過客)이다. 재임 기간 동안 설득과 압력을 적절하게 섞어 집권당이 자신의 국정 목표를 달성하는 데 앞장서도록 하고 임기가 끝나면 미련 두지 않고 떠난다. 나그네마다 여관을 통째 바꾸려 하면 정당이 남아날 수 없다. 집념이 지나칠 경우 여당의 다음 대선 후보에 의중(意中)의 인물을 앉히려 한다거나 퇴임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불필요한 의혹을 불러온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그런 시도는 헌법 속 '다리 달린 뱀'의 화석이 보여주듯 나라를 혼돈(混沌)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사실 단임 대통령의 임기 후반기 레임덕 현상은 계절의 순환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왕정(王政) 시대나 공산 독재 정권에는 레임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임기말 권력 누수(漏水)는 평화적 정권 교체에 따르는 불가피한 부작용이기도 하다. 퇴임 직전 지지도가 60%를 넘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 말에도 권력이 한 방울도 새나가지 않도록 막겠다고 나서면 되레 일이 커진다.

대구·경북 유권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대통령을 한 몸이 돼 밀어줬다. 그곳 유권자들을 재산 물려주고 넘겨받듯 대통령의 사람들이 독차지하려 하면 피해는 그 지역에 돌아간다. 대통령의 그늘이 짙을수록 다음 시대를 떠맡을 재목(材木)이 자라지 못한다. 까치밥처럼 감나무 꼭대기에 하나 달랑 매달린 유승민 의원을 쪼아대는 모습은 그래서 더 처연(凄然)하게 비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현직 대통령의 최고 자랑과 퇴임 대통령의 최고 방패(防牌)는 업적만 한 게 없다. 집권 세력 누구에게나 이 길 말고는 다 사도(邪道)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