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BUSINESS 용어

그랑미션-차베스(II)

최만섭 2016. 2. 16. 09:40

휘발유 78L에 8원… 국가부도 지경에도 값 못올리는 정부

[베네수엘라 경제난 현장… 김덕한 특파원 르포] [下]

김덕한 특파원

지난 3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주유소에서 기자가 탄 대형 승용차에 휘발유를 가득 채우자 주유량 78L에 요금은 7.59볼리바르(Bs·베네수엘라의 화폐 단위)가 나왔다. 우리 돈으로는 8원 남짓, 1L에 0.1원인 셈이었다. '그냥 공짜로 주지 그 돈을 뭐하러 받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네수엘라에서 1달러면 2년치 기름값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아무리 산유국이라지만 베네수엘라의 석유류 가격은 세계에서 가장 싸다.

콜롬비아, 브라질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석유류를 팔아넘기는 밀무역도 성행한다. 밀무역꾼들에겐 한 번 거래에 1000배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장사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베네수엘라 정부에 돌아간다. 지난 1989년 카를로스 페레스 대통령이 기름값 인상을 시도했다가 폭동이 나 수백 명이 사망한 후 어떤 정부든 국민 눈치만 보며 가격 인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지금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여러 차례 인상하겠다는 말만 했을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여야 모두에서 국민을 이끌고 위기를 타개해 나갈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베네수엘라의 진짜 위기로 보였다.

지금 베네수엘라 정가의 가장 큰 논란거리는 전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대표적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 정책인 '그랑 미션 주택', 즉 정부가 지어 무상 또는 초저가로 임대한 주택의 처리 문제다.

“165번” 손목에 번호표 찍고 생선 사는데 - 지난 6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어시장에서 손목에 165번이라는 대기 번호가 적힌 여성이 오래 기다린 끝에 생선을 구입하고 있다(왼쪽). 휘발유 10L에 1원, 기름값은 못 올려 - 기자가 3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주유소에서 SUV에 휘발유를 가득(78L) 넣었다. 요금은 7.59볼리바르로 원화로는 8원 정도다(오른쪽). /블룸버그·카라카스(베네수엘라)=김덕한 특파원

헐값에 집 준다고 해도
"차베스는 그냥 줬다" 반발
국민눈치만 보다가 경제 파탄
1000배 수익 내는 밀무역꾼 극성


마두로 정부는 공약한 300만채 중 100만채 건설이 끝났다며 업적을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2월 총선에서 압승하며 의회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 야당 민주연합회의(MUD)는 100만채는커녕 20만채도 못 지었을 것이라며 임대주택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예 등기를 넘겨주자고 나섰다. 등기를 하게 되면 정부가 집을 정말 몇 채 지었는지 드러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예산을 얼마나 빼돌렸는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야당의 계산이다.

마두로 정부는 결사반대다. 야당이 추진하는 '주택소유권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하며 마두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민에게 시위에 나서라고 사실상 선동까지 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1월 말 국영방송 연설에서 "위대한 그랑 미션 주택 정책을 방해하고 집을 사유화하려는 야당의 시도를 막기 위해 국민은 거리로 나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지난 2일 카라카스 시내 국회 앞에서 실제로 시위대 1000여 명이 모여 '그랑 미션 주택 사유화 반대' 집회를 열었다. 시위대는 "차베스는 줬는데 너희는 왜 못 주느냐" "우리에게서 집을 빼앗지 말라"고 외쳤다. 현장에서 만난 한 40대 여성에게 "자기 집으로 등기를 해주면 좋은 것 아니냐"고 묻자 "그냥 (공짜로) 넘겨줘야지 왜 돈을 받으려 하느냐"고 말했다.

-포퓰리즘에 젖은 국민 "왜 돈 받나"
야당 추진 임대주택 사유화 반대
대통령도 "거리서 싸워라" 선동


야당 주장에 대해서도 "또 다른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 예비역 장성은 "야당은 30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등기를 넘겨주라고 하는데, 만약 집을 받은 사람이 집값을 못 갚더라도 베네수엘라 법에는 첫 번째 주택은 무조건 보호해 주게 돼 있어 집을 빼앗길 염려는 없다"며 "여당은 임대주택에 사람들을 계속 살게 해 자기들의 지지자로 묶어 두려는 것이고, 야당은 이들을 여당의 영향권에서 빼내려는 것으로, 정치 싸움일 뿐"이라고 했다.

야당은 지금 마두로 정부를 넘어뜨리고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는 카드를 쥐고 있다. 마두로 정권 임기 절반을 맞는 오는 4월부터 '국민소환'을 통해 현 정권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2를 얻는 대승을 거둔 야당으로서는 정권 교체를 이룰 절호의 기회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국민소환을 단행하면 마두로를 물러나게 할 가능성이 99.9%쯤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속내는 정권 심판을 외치는 겉모습과는 다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야당 의원은 지난 2일 "국민소환을 통해 정권 교체를 하면 마두로의 잔여 임기인 2019년 4월까지만 대통령을 맡게 되는데 그건 부담이 너무 크다"며 "지금까지 차베스·마두로 정권이 쌓아온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그해 대선에서 오히려 우리가 지게 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야당이라고 무상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지난 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난 MUD의 앙헬 메디나 의원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면서 "그런 정책을 사회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베네수엘라는 좌파, 우파로 나눠서 생각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폭동날까봐, 수퍼마켓 앞에 치안유지군 - 생필품을 주로 수입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에 외화가 고갈되면서 심각한 물자 부족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생필품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수퍼마켓 주변에서 압사 사고와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군·경찰을 동원해 ‘무장 경비’에 나서고 있다. /카라카스(베네수엘라)=김덕한 특파원

-경제난에 가장 위험한 나라로
차베스 집권 이후 10여년 만에
살인 등 강력 범죄, 세계최악 수준


차베스 정권부터 이어져 온 '정권 보신주의'는 베네수엘라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만들었다. 베네수엘라 군(軍)에는 육·해·공 3군 이외에 '가르디아'라고 하는 치안유지군이 있다. 이들이 무장을 하고 경비를 맡고 있지만 살인, 납치 등 강력 범죄는 차베스 집권 이후 10여년 만에 세계 최악 수준으로 악화됐다.

베네수엘라 곳곳에는 특권·특혜의 흔적이 묻어난다. 정부는 '그랑 미션' 사업으로 지은 중산층 주택을 220만Bs(약 260만원) 정도에 분양해 주기도 하고, 중국산 체리 자동차의 SUV(스포츠유틸리티차)를 125만Bs(약 150만원)에 살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물론 힘 있는 특권층에게만 돌아가는 혜택이다.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일반 국민은 정부의 허술한 정책의 틈을 파고들어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외국인 회사 직원인 페드로(42)씨는 "예전에 가족 여행을 가면 정부에서 1인당 3000달러씩 지원해줬는데, 네 식구가 가까운 가이아나에 다녀온 후 거의 1만달러를 남겼다"며 "그 돈을 챙겨 두지 않았다면 지금 정말 힘들고 억울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에게서 애국심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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