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한 홍보회사에 다니는 강모(여·27)씨는 설 연휴를 하루 앞둔 5일 시력 교정 수술을 받는다. 지난달 겨울 휴가 때도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이날로 수술을 잡았다. 명절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부모와 친척을 피하기 위해서다. 수술 후 눈을 가리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핑계로 아예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강씨는 "지난 추석 때 '그런 작은 회사 다니려 대학 다녔느냐' '언제 대기업으로 이직할 거냐'고 묻는 친척들 때문에 고생했다"며 "다음 명절 때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친척 집에 안 갈 생각"이라고 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명절에 오히려 가족들을 피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선물 준비와 집안일, 웃어른의 참견과 훈계에서 오는 '명절 스트레스' 등을 피해 도망치는 일명 '명절 버그아웃족(Bug-out族)'이다. 버그아웃은 전쟁이나 재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하는 걸 말한다.
이들에겐 단기 아르바이트가 피난처 중 하나이다.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천국이 지난 1일 회원 12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0.4%가 설 연휴에 아르바이트를 계획 중이라고 답했다. 이들 중 10.3%는 '친척과 학업, 취업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피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일종의 '피신용 알바'인 셈이다.
설 연휴 기간인 7~9일 광주광역시의 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신모(29)씨는 "작년 하반기 기업 공채 때 취업에 실패해 친척들 볼 낯이 없어졌다"며 "스트레스를 받느니 아예 안 보는 게 낫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적잖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이모(여·29)씨는 설 연휴를 맞아 고향 가는 기차표 대신 베트남 하노이행 항공권을 끊었다. 며칠 전 '이번 설에는 남자 친구를 집에 데려올 거냐'는 어머니 전화를 받고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이씨는 "고향 집을 갈 때마다 결혼 문제로 시달리는 데 지쳤다"고 했다.이런 '도피성' 해외 여행객이 늘면서 이번 설 연휴 동안 하루 평균 해외 출국자는 10만5727명에 달할 것으로 한국교통연구원은 내다봤다. 지난해 8만9570명보다 18% 정도 늘어난 수치다.
온라인 마트들은 귀향하지 않고 자취방이나 기숙사에 머무르는 젊은이들을 겨냥한 상품도 내놨다. GS샵은 올해 설 연휴를 맞아 '우렁각시' 세트를 출시했다. 즉석밥과 참치통조림, 떡국, 라면, 부침가루, 햄 등 명절 분위기를 내며 혼자 해먹을 수 있는 식료품 묶음이다. 신진호 GS홈쇼핑 홍보팀장은 "설을 앞두고 GS샵 회원(775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 보니 '명절이 괴롭다'는 응답이 26.2%나 나왔다"며 "이들 중 상당수가 자취방을 피신처로 삼을 가능성이 커 '버그아웃백(대피용 용품을 담은 가방)' 성격의 세트 제품을 준비했다"고 했다.
부모나 친지와 마주치는 게 오히려 괴로운 취업 준비생을 위한 '대피소'까지 등장했다. 외국어학원인 파고다아카데미는 오는 설 연휴 기간에 전국 8개 지점(支店)에
'명절대피소'라는 이름의 공간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대형 강의실과 스터디룸, 자습실 등을 취업 준비생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행사다. 지난 2일 기준으로 600여 명이 예약했다고 이 학원은 밝혔다. 학원 관계자는 "명절 동안 가족·친지들의 잔소리를 피해 보낼 수 있는 일종의 피난처"라며 "설 연휴에 1000명 정도가 대피소를 이용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