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트렌드 돋보기] 나는 '흙수저'라 좋다

최만섭 2015. 12. 23. 10:19

[트렌드 돋보기] 나는 '흙수저'라 좋다

김윤덕 문화부 차장 사진
김윤덕 문화부 차장

서른 살 배지영씨는 일본 돗토리현청 공무원이다. 관광전략과에서 5년째 일한다. 지난가을 돗토리현에 취재 갔다 그녀를 만났다. 돗토리현 골목 골목을 원주민보다 더 잘 알고 안내하던 그녀는 재바른 일 솜씨만큼 웃는 얼굴이 예뻤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 주말로 이어진 강행군에도 "재미있다"며 웃었다. 미덥고 든든했다.

울산이 고향인 지영씨는 지방대 출신이다. 해외 복수 학위제가 있다는 걸 알고 4학년 때 돗토리국립대학으로 갔다가 취업에도 성공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친 2008년, 일본 청년들도 일자리 잡기 어려운 시기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여러 군데 원서를 넣었지만 1차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작은 정보 서비스 업체 인턴십부터 시작했다. 일본말 서투르니 업무를 따라잡지 못해 좌절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국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국제관광서포트센터에서 한국인 스태프로 일한 게 발판이 됐다. 돗토리현청이 '국제교류원'이란 이름의 계약직 공무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그사이 늘어난 일본어 실력, 관광 업무 경험을 무기로 지원했고 합격했.

"운이 좋았냐" 묻자 지영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운도 자기가 만드는 거였어요." 국제교류원은 채용 후 3년까지 평점 B 이상을 받아야 고용이 유지되고, 4~5년까지는 A 이상 받아야 재계약이 가능하다. 5년째부터는 최고 등급 S를 유지해야 한다. 관광 책자를 만들기 위해 주말이면 진짜 맛집인지 소문만 요란한 집인지 순례하며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영씨는 4년 차인 지난해 이미 S등급을 받았다. 지영씨는 "출발이 얼마나 근사한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걸음씩 도전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실패하면서 배운 것들을 밑천 삼아 최선을 다했더니 또 다른 문이 열렸다"고 했다.

서울대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읽다가 지영씨를 떠올렸다.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지능) 색깔이 아닌 수저(계급) 색깔'이라는 유서 한 줄이 가슴을 찔렀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안타까우면서도, 이 극단의 자학과 분노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갈까 염려됐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과연 부(富)와 계급일까. '금수저'는 특혜가 될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도 있다. 뛰어난 두뇌가 생존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억대 연봉이 아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거기가 '신(神)의 직장'이다. 인생엔 정답과 오답, 1등과 낙오자가 있을 뿐이라 가르친 우리 교육 탓일까. 한 사람의 생존과 행복을 결정하는 변수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흙수저 자성론'을 불 지핀 어느 대학생 글에 콧등이 시큰했다. "나 는 흙수저란 말이 싫다. 부모님이 그 단어를 알게 될까봐 죄송하다. 나는 부모님에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흙을 받았다. 그래서 감사하다." 가진 것 쥐뿔도 없지만 "덤벼라 세상아!" 외치며 호기를 부리는 게 젊음이다. "요 정도로 물러설 줄 알았다면 오산이라고 전해라~" 배짱 퉁기는 이가 갑(甲)이다. 불평등한 세상에 무릎 꿇지 않아야 청춘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