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개혁

[동서남북] 난무하는 포퓰리즘에 입 닫은 財界

최만섭 2015. 11. 30. 15:41

[동서남북] 난무하는 포퓰리즘에 입 닫은 財界

조형래 디지털뉴스본부 취재팀장 사진
조형래 디지털뉴스본부 취재팀장
강신호 전(前)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는 사근사근한 성품이었다. 기자간담회를 할 때면 자신의 회사에서 만드는 박카스를 기자들에게 한 병씩 나눠주고 "타우린 성분이 많은 박카스는 피로 해소에 좋아서…"라며 한두 마디 농을 덧붙여 웃음을 자아내곤 했다. 그런데 입바른 말도 곧잘 했다. 2004년 전경련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단점이 뭡니까?"라고 묻자, 강 전 회장은 "노 대통령께서 말씀을 10분의 1로 줄이고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면 금세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고 말해 좌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강 전 회장은 곧바로 "내가 나이가 들어서 주책 맞게 말실수를 했다"고 얼버무렸지만, 그는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여러 번 노 대통령의 말 수(數)에 대해 은근히 지적하곤 했다.

박용성 전 대한상의 회장에겐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정작 본인은 그 별명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아픈 곳을 콕콕 찔러 대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발언을 자주 했다. 그는 말만 많고 실행력이 떨어지는 노무현 정부를 'NATO (No action talk only)' 정부, 'NAPO (No action plan only)' 정부라고 꼬집었다. 각종 시위와 불법 파업이 난무하는 데 대해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떼법의 일상화", 정치권의 지지부진한 규제개혁에 대해서는 "소득 7000달러 국가 수준의 삼류 정치권"이라는 식으로 신문 기사 제목거리를 잘 던졌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한마디 했다 하면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재계 1위 그룹 총수의 발언이라 진의(眞意)보다 발언의 내용과 강도가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회장은 할 말을 해야 할 때면 서슴지 않고 짧고 강렬한 독설을 날렸다. 대표적인 게 이명박 정부 경제 정책에 대해 "낙제는 면했지요"라고 말한 것이다. 이 발언으로 삼성전자가 세무조사를 받고 수천억원대의 추징금을 내는 고초를 겪었지만 그 후에도 이 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이 기업인들의 발언을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돈 많은 재벌의 불평"이라며 불편해했다. 그럼에도 인정해줘야 할 점은 이 기업인들의 공동체 의식이다. 이건희 회장이나 박용성 회장이 기자를 만나면 삼성이나 두산의 경영 수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은 별로 없었다. 국가경제와 나라의 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언(苦言)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권과 우리 사회에 대해 하기 힘든 말을 하는 기업인이 거의 없다.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무상보육, 청년실업 수당에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의 조건으로 기업에서 돈을 걷어 FTA 피해 농가에 나눠주겠다는 반(反)시장적인 포퓰리즘이 난무해도 정작 돈을 내야 하는 기업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여기에는 갓 경영 전면에 나선 3~4세 오너들의 내공(內功)이 아직은 앞선 세대보다 떨어지는 것도 이유겠지만, 기업을 짓누르는 사회적 분위기 탓도 있다. 어느 틈엔가 재계에는 '괜히 나섰다가 욕만 먹을 텐데'라는 냉소주의가 팽배하다. 중공업·화학·스마트폰 등 기존 주력 사업의 쇠락이 뚜렷한 상황에서, 기업을 일으켜 사회에 기여한다는 정신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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