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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사회] 인생은 수저 한 벌만 쓰지 않는다-조선일보

최만섭 2015. 11. 2. 11:03
[법과 사회] 인생은 수저 한 벌만 쓰지 않는다
  • 최재경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입력 : 2015.11.02 03:20

사우디 왕자는 全재산 기부
한국은 유류분 제도 때문에 일정 재산은 반드시 물려줘야
약자 보호 위한 제도였으나 자식의 부양의식 약해져 악용
기부 살리려면 재고 필요해

최재경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사진
최재경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올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가 전 재산인 320억달러를 자선 사업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큰 화제가 됐다. 그의 삶을 기록한 책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를 읽고 감탄하다가 한국에서는 그런 기부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유류분(遺留分) 제도' 때문이란다.

유류분은 쉽게 말해 상속인에게 한 푼도 남겨주지 않겠다고 하거나 제삼자에게 모든 재산을 증여해버려도 그 의사와 무관하게 일정 비율의 상속 재산은 물려줘야 하는 제도다. 로마법에서 유래해 독일·프랑스 등의 대륙법계에서 인정되다가 1977년 12월 민법 개정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됐다. 자기 재산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다. 유언으로 상속 재산을 자유롭게 분배하고, 생전에 마음대로 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약자인 유족의 생존권 위협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전처 자식이나 딸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는 불합리한 유언을 생각해보라.

우리 민법이 유류분 제도를 도입한 배경도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구습에서 여성의 상속권을 일정 한도나마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딸·아들 구분 없이 법정 상속분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유류분을 인정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수단이던 유류분 제도가 최근 들어 비판받고 있다. 이것 때문에 자식들이 상속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해서 불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불우 이웃을 위해 뜻있는 기부를 하고 싶어도 자식들 눈치에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자선 단체 등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 소송을 하는 사례도 많아졌다고 한다. 사회가 고령화되고 저출산으로 자식 수가 줄면서 부모 자식 간의 부양 의무가 강조되던 전통적 가족 문화는 와해 직전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상대로 '불효 소송'을 제기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국회에서 '불효자식방지법'이 발의되는 시대 아닌가.

기부 문화는 선진국의 징표다. 미국은 빌 게이츠 등 부호들이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장래를 망친다"며 자선 단체에 거액을 기부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대부분 주(州)에서 '상속의 자유'가 보장되고 유류분이 없기 때문에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전 재산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우리나라도 1984년 몇몇 기업인이 사회에서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을 시작했고 점차 확산 중이다. 하지만 '유류분 제도'가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지금 상속 문제를 고민하는 세대는 대부분 부모로부터 유산 한 푼 받지 못하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자수성가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단칸방에서 시작해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겪으며 이리저리 이사 다닌 끝에 집 한 칸 마련하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그랬기에 이웃의 불행에 더욱 공감해서 피땀 흘려 번 돈을 기꺼이 자선 단체에 쾌척하는 것이지 부자라서, 쓰고 남아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금수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거나 공짜로 얻어 걸친 사람이 남의 어려운 사정을 알기 쉽겠는가.

이들은 자식들의 부양을 기대하지 않는다.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자신들이 평생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노년의 고독과 궁핍에 맞서 당당하고 멋지게 살다 가겠다고 각오한다. 형제·자매 간의 재산 분쟁이 흔해진 사회를 보면서 자식들의 싸움을 막으려면 생전에 모두 써버리거나 좋은 곳에 기부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배웠다.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유류분 제도를 당장 폐지하기는 어렵더라도 기부 문화를 활성화하고, 가족 유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검토해볼 시점이 됐다. 공익적 기부에는 적용을 배제하거나 현행 2분의 1인 유류분 비율 축소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평소 아이들에게 '네 팔은 네가 흔들라'고 해왔다. 필요한 교육은 시키지만 그 뒤의 삶은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알아서 살라는 뜻에서였다. 자식 걱정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살아보니 인생은 홀로 꿋꿋하게 자신의 두 발로 걸어가는 것이고, 남에게 기대려는 나약한 마음이나 거저 생긴 돈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알 왈리드 왕자가 기부 발표장에 두 자녀를 동석시킨 것 에서 대부호다운 심모원려와 함께 자식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 '수저 계급론'이 유행한다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사진을 보면 걱정스러워진다. 이 말을 하고 싶다. '사람은 평생 한 벌의 수저만 쓰지 않는다. 노력해서 점점 나은 수저를 쓰는 것이 진정 행복한 인생이다'라



적수공권 [赤手空拳] :

붉을 적, 손 수, 빌 공, 주먹 권. -맨손과 맨주먹, 즉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

[네이버 지식백과] 적수공권 [赤手空拳]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이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