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과 수필 이야기
출생 : 1910년 4월 21일 사망 : 2007년 5월 25일 신체 : 키155cm, 체중40kg 출신지 : 서울특별시 직업 : 수필가 학력 : 후장대학교 가족 : 손자 바이올린연주가 스테판 재키 데뷔 : 193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을 발표 경력 : 1995년 문학의해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1975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수상 : 1999년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1995년 제9회 인촌상 문학부문 대표작 : 인연, 플루트프레이어, 피리부른사람 팬카페 : 아름다운 인연♣피천득님
1. 지식과 자유 사이. “어떻게 하면 골프를 잘 칠 수 있나?”라는 물음에 세계적인 골프 선수인 최경주는 “지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과거 그가 알고 있었던 골프 지식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1993년에 프로로 전향한 그는 잘할 수 있다는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10여 년간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 후에야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골프 관을 자신 있게 피력했다. “내 골프의 비법은 클립(골프채의 손잡이 부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골프와 수필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일 훌륭한 수필가가 되고자 한다면, 나는 피천득의 대표작 “수필”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피천득에게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피천득이라는 고유명사는 수필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릴 만큼 그가 수필 문학에 남긴 자취는 너무나 크고 찬란하기 때문이다.
2. 피천득의 대표 작. 제목 :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수필의 성격).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오,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수필과 삶과 연륜).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 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수필의 미감).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또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수필의 제재와 표현).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수필의 고백성).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쓰는 이의 자세).
3.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은 필자 피천득 자신의 수필론 이다. 그의 수필론으로 포섭할 수 없는 그 밖의 수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수필론을 뒷받침하는 수필이 따르지 않는 수필론 들은 우리에게 아무 흥미도 없다. 작가가 수필을 쓴다는 행위는 수필론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그 형식이나 내용이 자유로운 문학 장르다. 그러나 나는 수필에서 자유란 수필가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란 삶과 죽음, 종교와 철학,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수필가는 자기의 종교를 굳은 신념으로 지키고 타인의 종교를 존경하며 자신과 다른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을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 속이 탁 트인 자유인이 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일상에 투영된 삶의 가치를 보편적인 가치로 그려내야 한다.
흔히 소설을 가공의 진실이라고 한다.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진실을 집어넣는 문학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수필은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정직한 자기 고백의 문학형태다. 따라서 훌륭한 수필은 화려한 글이 아니라 정직한 글이다. 모 대학 교수의 수필을 읽은 제자가 “어떻게 선생님의 수필과 생활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라고 다그쳐서 식은땀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글이 실패한 수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수필에서의 정직은 행위의 진위뿐만 아니라 심정적인 진실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를 찬성하면서도, 세상 정서에 맞추고자 이에 반대하는 것처럼 거짓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을 정직하게 쓰는 행위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수필은 문학적인 문체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문학적인 문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전에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비문학적인 문체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신문 사설” “판사의 판결문” “최고 경영자의 신년사” 등이다. 물론 이러한 글들은 모두 그 방면에서는 훌륭한 글이다. 그러나 수필 문학에 사용하는 문체로는 적합하지가 않다. 그러면 문학적 문체란 무엇인가? 인간이 어떤 사건에 직면할 때마다 생산된 다양한 감정과 우리 내부에서 자체 생성된 수많은 감정은 가슴 속에 침전물처럼 쌓여 깊은 호수를 이루게 된다. 문학적 문체란 이 호숫물로 그린 동양화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호숫물을 끄집어내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바다 속에서 석유를 캐내는 작업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성이 있는 곳에다 끊임없이 탐사봉을 내리꽂는 것뿐이다. 따라서 수필은 문학적 문체를 탐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 행복.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말은 “홀가분하다.”이며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말은 “참담하다.”라고 한다. 피천득과 수필 이야기를 쓰고 난 후에 나의 마음은 홀가분하고 행복해 졌다. 산고를 격은 산모가 자신의 분신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러하리라.
피천득의 말대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을 목격할 수 있는 수필가는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