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1] 32만㎞ 누비며 호주·하와이 발견… 태평양 정복한 ‘캡틴 쿡’

최만섭 2022. 8. 2. 04:52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1] 32만㎞ 누비며 호주·하와이 발견… 태평양 정복한 ‘캡틴 쿡’

18세기 위대한 탐험가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

입력 2022.08.02 03:00
 
 
 
 
 
제임스 쿡은 1768~1779년 3차례에 걸친 항해를 통해 남극과 북극, 호주 남쪽 태즈메이니아, 아르헨티나 남쪽 티에라 델 푸에고, 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시베리아 북동단 해안을 두루 탐사했다. 그의 항해는 유럽의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의 최하층 계급 출신인 쿡은 전문성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해군을 이끄는 선장에 올랐다. 그림은 쿡의 선단(船團)이 폴리네시아의 한 섬에 정박한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근대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양(大洋)을 탐험했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자세히 파악한 이후 18세기에 탐험해야 할 미지의 공간으로 남은 곳이 태평양이었다. 당시 태평양은 ‘논둠 코그니타(Nondum cognita·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소)’라 불렸다. 태평양 해역을 그린 해도(海圖)는 일부 지역 해안선을 점선으로 대충 그려놓은 상태에 불과했다. 이 광대한 바다와 섬들, 사람들과 동식물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 제임스 쿡 선장(Captain James Cook·1728~1779)이다.

수로 파악·지도 제작에 뛰어난 능력

쿡은 1728년 10월 27일 요크셔의 날품팔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하층 계급 출신이었으나 그나마 학교를 조금 다녀서 읽기와 쓰기, 산수를 배웠다. 13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잡화상 일을 하다가 14세에 도망가서 석탄운반선의 견습 선원이 되었다. 7년 동안 일하며 항해, 지도 제작, 천문 공부를 했는데, 그의 성실성에 감탄한 고용인이 그를 다른 석탄운반선의 1등 항해사로 천거했다. 27세가 되어 선장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하급 수병으로 해군에 입대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 해군에서 더 큰 승진 기회를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7년전쟁(1756~1763) 당시 캐나다 식민지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충돌한 퀘벡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영국군이 승리한 핵심 원인은 많은 병력을 안전하게 이송한 데 있다. 모래톱과 암초가 많아 운항이 매우 힘든 세인트로렌스강을 통해 병사들을 이송해야 하는데, 프랑스 해군이 단 한 척의 배도 보내지 못한 데 비해 영국 해군이 60척을 올려 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쿡이 아주 정확한 수로(水路)를 지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안선이나 수로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지도에 옮기는 일에 아주 유능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캐나다 해안 지도를 그렸고, 1766년에는 일식을 관찰하고 보고서를 왕립협회에 제출했다. 이처럼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가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다.

당시 유럽 각국은 다른 나라에 앞서 낯선 해역을 파악하여 자국 소유로 삼으려 하는 동시에, 세계에 대한 과학 지식을 늘리고자 했다. 과학과 정치군사 측면은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태평양 항해는 그와 같은 각국 간 경쟁의 주요 무대였다. 18세기 중엽 주요 국가 간 항해와 과학 능력을 다투는 계기가 생겼다. 1769년 6월 3일에 금성이 태양면을 통과하게 되는데, 지구 각지에서 이 현상을 관찰하면 지구~태양 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고 태양에 대한 여러 과학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영국 왕립협회는 국왕 조지 3세에게 남태평양에 과학 탐구용 선박을 보내자고 제안하여 승낙을 받았다.

왕립협회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공식 수로학자(hydrographer)이며 문필가인 알렉산더 달림플(Alexander Dalrymple)을 지휘관으로 추천했다. 그렇지만 해군본부는 해군이 아닌 사람에게 선박 지휘를 맡기는 데에 난색을 표했고, 대신 제임스 쿡을 천거했다. 사실 쿡은 해군 바깥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인 데다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어서 반대도 많았으나, 워낙 출중한 실력을 발휘해온 터라 결국 그가 낙점을 받았다.

1775년 제임스 쿡 초상화. 이로부터 4년 후 쿡은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갈등 끝에 살해당했다. /위키피디아

쿡이 고른 배는 368t급 석탄운반선 인데버호였다. 원래 험한 바다에서 많은 석탄을 운반하도록 만든 배라 공간이 넓어서 많은 승객과 과학 기구들을 실을 수 있고, 빠르지는 않지만 안정감 있는 배여서 원양 항해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배에 장교와 선원 83명, 그리고 왕립협회 회원 11명이 탔다. 그 가운데 25세의 거부 과학자 조셉 뱅크스(Joseph Banks)가 1만파운드라는 거금을 기부했고, 탁월한 과학 실력을 인정받아 이 사업의 학문적 리더로 인정받았다. 하층 출신 쿡 선장과 귀족 자제 뱅크스는 성향이 다르면서도 서로 상대방을 탁월한 인재로 존중하며 깊은 우정을 느끼면서 협력해 나갔다.

원래 사업 목적인 천문학 관찰 자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망원경과 천문학 지식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부수적인 목표가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태평양 해역을 샅샅이 조사하고, 특히 ‘미지(未知)의 남방대륙(Terra Australis Incognita)’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쿡이 출항할 때 받은 명령서에는 금성 관찰이 끝나면 밀봉 봉투 안에 있는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그 극비 지시 사항이 그동안 알려진 경계 너머 남쪽으로 항해해 가라는 것이었다.

 

하와이 원주민과 갈등 끝에 목숨 잃어

‘미지의 남방대륙’은 로마시대의 지도 제작자 폼포니우스 멜라(Pomponius Mela)가 처음 생각해 낸 용어다. 고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 개념에 따르면, 북반구에 거대 대륙들이 몰려 있으므로 지구가 균형을 이루려면 남반구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륙이 존재해야 한다(현대 과학적 사고로는 틀린 개념이다). 유럽인들은 제2의 신대륙 발견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듯 누군가가 거대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게 되면 이야말로 ‘초대박’이 아닐 수 없다! 유럽인들로서는 남쪽으로 갈수록 날씨가 더워진다고 생각할 만하므로 남방 대륙은 아주 더운 곳이라고 예측했다. 아마도 온화한 기후에 자원이 풍부할 테고, 따라서 그곳에는 문명화된 사람들이 산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실제 탐사 결과는 그런 주장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쿡은 남위 40도 해역을 항해했으나 그와 같은 거대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만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이때 발견한 곳을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라고 명명하여 후일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 영토가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미지의 남방 대륙’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제임스 쿡의 주요 임무였다. 사진은 제임스 쿡이 첫 항해를 떠난 지 250주년을 맞은 2018년에 영국에서 열린 기념 축제의 한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쿡 선장은 이후 두 번 더 태평양 탐사 항해를 했다. 제2차 항해(1772∼1775)는 해군성의 명령에 따라 본격적으로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아 남위 71°10′까지 내려갔다. 2만㎞를 넘는 극도로 위험한 항해를 한 끝에 이 해역에 남방대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3차 항해(1776~1779)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관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북태평양을 탐험하는 것이었다. 쿡은 샌드위치제도(하와이)를 발견하였고, 여기에서 북아메리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알래스카 남부를 지나 6월 말 베링 해협으로 들어갔다. 북빙양(北氷洋)에 도달하였으나, 8월 중순 두꺼운 빙판에 막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어 하와이로 되돌아갔다. 이곳에서 현지 주민들과 갈등 끝에 쿡 선장은 목숨을 잃었다. 남은 선원들은 다시 베링 해협 탐험을 위해 북위 70°33′까지 올라갔다가 1780년 10월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세 번에 걸친 기념비적 항해에서 쿡 선장은 남극과 북극, 태즈메이니아, 티에라 델 푸에고, 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시베리아 북동단 해안을 모두 탐사했다. 그가 수행한 항해 거리는 32만㎞에 달하는데 이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에 해당한다. 그의 항해는 지리 지식 증대에 크게 기여했고, 유럽의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두는 데 결정적 요인은 쿡 선장의 리더십이다. 꼼꼼하고 능숙한 일처리는 물론이고, 선원들을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잘 지휘하였다. 지도력이 없으면 흔히 말하듯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기이한 꼴을 보게 된다.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것이 어디 배 한 척 지휘하는 일뿐이랴.

[선원들 ‘괴혈병’ 막은 쿡 선장]

비타민C 보충 위해 양배추 절임 먹여

대항해시대에 선장의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 선원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쿡 선장은 선원들의 사망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위생 문제에 신경을 써서 침구, 옷가지를 정기적으로 세탁하도록 하고, 식초로 바닥을 닦고, 유황불로 실내 공기를 소독하도록 했다. 선원들에게 목욕을 강제하여 심지어 북극권의 차가운 날씨에서도 반드시 규칙적으로 목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선원들의 사망 원인 1위는 괴혈병이었다. 이 병 때문에 원양 항해를 마치기까지 선원 중 절반 이상, 심지어 75%가 죽는 일도 벌어졌다. 사람들은 비타민C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는 과학적 설명은 못 해도 경험에 의해 감귤류 같은 특정 식품이 괴혈병 예방과 치료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쿡 선장은 괴혈병 예방 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진 양배추 절임(사워크라우트)을 3000㎏ 넘게 싣고 선원들에게 먹이려 했다. 그렇지만 선원들은 익숙지 않은 음식은 입에 대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여, 양배추를 죽어도 안 먹으려 했다.

쿡 선장은 절묘한 방안을 생각해 냈다. 장교들에게만 양배추를 지급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전날까지 양배추는 죽어도 안 먹겠다고 우기던 선원들이 돌연 왜 자기들에게는 지급하지 않느냐고 아우성을 쳤다. 이후 쿡 선장의 항해에서는 적어도 괴혈병으로 죽는 사람은 없었다.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