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0] 르네상스 꽃피운 피렌체… 어떻게 그 많은 인재를 길러냈을까

최만섭 2022. 7. 19. 05:38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0] 르네상스 꽃피운 피렌체… 어떻게 그 많은 인재를 길러냈을까

피렌체의 힘

입력 2022.07.19 03:00
 
 
 
 
 
13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회화, 조각, 건축, 문학, 과학, 정치학 등 광범위한 부문에서 창의적 인재들이 연이어 등장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세대마다 위대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계속 등장한 배경으로 오랜 숙성 끝에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시·국가의 문화 환경을 꼽을 수 있다. 혁신 인재들이 새로운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켜 인류의 자산을 확대한 것이다. 그림은 1493년에 출간된 책에 담긴 피렌체 전경으로 하르트만 셰델의 목판 작품이다. 강 왼편의 커다란 돔 건물이 두오모 성당이다. /위키피디아

인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의 한 도시에 최고의 창의적 천재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그렇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자,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같은 문인, 피디아스와 폴리클레이토스 같은 조각가 등 역사상 두 번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거장들이 활약하며 그야말로 서구 문명의 기초를 만들어냈다.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또한 유사한 사례다. 칼리파 알만수르(754~775년 재위)는 ‘지혜의 전당’이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고전 문명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알마게스트’, 유클리드의 수학서 ‘원론’, 플라톤의 철학서 ‘티마이오스’, 인도학자 브라마굽타의 천문학·수학서 ‘브라마시단타’ 같은 고전을 번역한 다음 일급 학자들이 주해(注解)와 심층 연구를 했다. 아랍 문명의 이런 성과를 물려받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이후 근대 서구 문명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3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대략 3세기 동안의 피렌체 또한 유사한 사례다. 보카치오부터 브루넬레스키까지, 토리첼리부터 갈릴레이까지,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단테부터 마키아벨리까지 회화, 조각, 건축, 문학, 과학, 정치학 등 광범위한 부문에서 천재들이 나타나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신기원을 이루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천재들의 활동 무대는 실로 좁은 공간에 불과하다. 서쪽의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부터 동쪽의 산타크로체 교회까지, 그리고 북쪽의 산마르코 수도원부터 남쪽의 로마나 성문까지 피렌체 구도심은 동서 간 1.5㎞, 남북 간 1.5㎞에 불과하다. 이 협소한 공간에서 그처럼 위대한 인재들이 북적거리며 살았다는 게 흥미롭다. 성격 까칠한 젊은 미켈란젤로가 골목길에서 나이 지긋한 다빈치를 만나 시비를 걸면 점잖은 선배 예술가가 무심히 웃고 지나가는 식의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왼쪽부터)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니콜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갈릴레이

세대마다 위대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계속 등장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한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 막연한 말이지만, 오랜 숙성 끝에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시·국가의 문화 환경이 계속 인재를 키워내는 흐름을 이어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배경에서 그런 선순환의 흐름이 만들어졌을까?

피렌체는 여러 장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밀, 올리브, 포도주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주변 농촌을 들 수 있다. 우선 먹고살 만한 안정적 물질적 기반을 갖추어야 다음 단계의 문화 역량 발전을 꾀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이야 널려 있으니 이것이 결정적 요인은 분명 아니다. 그보다는 상업과 공업, 은행업이 더 중요한 요소다. 직물업을 통해 점차 큰돈을 벌고, 유럽 전역의 대상인들과 군주 및 귀족들을 대상으로 금융거래를 하여 더욱 큰 부를 쌓아갔다. 14세기에 이르면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 가장 활력 있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부유한 대가문들이 성장했고, 일부 가문이 쇠락하면 다른 대가문이 치고 나오곤 했다. 스피니, 프레스코발디 같은 1세대 가문에 이어 바르디, 페루치 같은 2세대 가문들이 성장하고, 다시 이들이 쇠락하면 메디치, 스트로치 같은 3세대 가문들이 성장했다. 이 도시 귀족 가문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예술적으로 피렌체를 빛낸 주역들이다.

다만 특정 가문들의 권력 독점 사태를 막기 위해 제도적 정비를 했다. 예컨대 강력한 행정장관에게 사법 행정을 맡기되 의도적으로 피렌체 외부 가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겼다. 또 유럽 국제 정치 무대에서 피렌체가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했다. 로마, 밀라노, 신성로마제국 등 주변의 강력한 정치 세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균형을 추구하는 데 외교의 주안점을 두었고, 강력한 군사 집단의 권력 농단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다(다만 후일 이것이 피렌체의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사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황당과 황제당이라는 파당들 간 싸움, ‘치옴피의 난’(1378)이라 일컫는 노동자 봉기로 이어지는 극심한 계급 갈등 등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국가가 붕괴에 이를 정도로 방치하지는 않았다. 페스트 위기 또한 잘 극복해냈다. 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피렌체 시민의 정체성이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고 독특한 문화가 발전해 나왔다. 예컨대 1430년대에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돈이 모든 것의 뿌리”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브로델은 이를 두고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 곧 절약이나 시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근대 부르주아 문화 요소가 생성되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힘과 능력(virtù)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가 발전한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복합적 분위기에서 피어났다. 이제 시민들의 삶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해 갔다. 무엇보다 피렌체는 모뉴먼트, 궁정, 교회, 수도원 건물 등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스스로를 장식했다. 예컨대 1489년에 피렌체시는 대가문들이 5년 내에 웅장한 저택을 지으면 40년 동안 조세 특혜를 준다고 결정하여 이런 흐름을 장려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다름 아닌 두오모(Duomo) 성당 재건축이다. 원래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라고 하는 작은 규모의 성당이 시내 한복판에 있었는데, 1294년에 크게 재건축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시 조례를 보면 “다른 그 누구도 더 이상 장대하고 화려하게 지을 수 없도록 최대한 웅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인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00년 이상 끈질기게 수작업 방식으로 돌을 다듬어 거대한 성당을 지어나갔고, 한 세기 반이 지나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거대한 이중 구조의 돔을 올리는 난공사를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1469년 베로키오와 그의 제자 다빈치가 돔 위에 거대한 황금색 구(球)와 십자가를 얹음으로써 마침내 ‘꽃의 성모’라고도 부르는 성당을 완공했다.

 
두오모(Duomo) 성당은 피렌체 시내 한복판에 있던 작은 성당을 1294년에 재건축하기로 결정한 뒤 100년 이상 끈질기게 거대한 성당을 지어나가 1469년에 완공했다. /Gary Campbell-Hall

이 시기에 이르면 이제 피렌체는 예술과 과학, 철학에서 정점을 찍는 단계로 들어갔다. 부호들은 예술가들의 메세나가 되어 자신의 가문을 찬미하는 작품을 만들도록 했고, 길드는 능력 있는 예술가를 고용하여 자기 단체의 수호성인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사들이 거주하는 방마다 성스러운 그림들을 그려주었고, 보티첼리는 신비로운 이교 신들의 축제를 표현했으며, 도나텔로는 걸작 다비드상을 완성했다.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고대 철학을 연구하고 기독교와 고대 이교 문명의 융합이라는 고난도 이상을 추구했다.

현대에 이런 놀라운 일이 재현되는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혁신적 인재들이 새로운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켜 인류의 자산을 확대해 주는 현대의 피렌체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일까? 희망컨대 서울이나 대구, 광주 같은 우리 도시들이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수십 년 전이면 꿈도 꾸지 못했던 기적 같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제 다음 단계로 엄청난 문화적 비약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보자. BTS, 임윤찬, 조성진 같은 탁월한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허준이 교수 같은 수학과 공학의 천재들이 빛을 발하는 현상이 어쩌면 그런 조짐이 아닐까.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잉어가 뛰어오르듯 이 땅에 새로운 기운이 약동하면 좋겠다.

[피렌체에서 활동해야 하는 이유]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어디에서 활동해야 탁월한 화가가 될 수 있냐고 묻자 그의 스승은 다름 아닌 피렌체라고 답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비판 정신이다. 이 도시의 공기는 사람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어서 결코 평범한 작품에 만족하지 않으며, 작가의 이름에 대한 존경보다는 선(善)과 미(美)에 따라 판단한다. 둘째, 이 도시에서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늘 자신의 지성과 판단력을 발휘하고, 자기 일을 하는 데 잘 준비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며, 돈 버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 나라는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잘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영광과 명예에 대한 갈망이다. 이곳 분위기는 주변 사람들과 동등한 정도, 심지어 열등한 수준에 있어도 만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곧 뒤처지고 만다. 이런 충고에 따라 페루지노는 피렌체에 와서 안드레아 베로키오의 지도를 받았고, 몇 년 후 큰 명성을 얻어 이탈리아 전역에 그의 작품이 넘쳐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