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나전칠기로 돈 번 청년, 석유회사 ‘셸’ 창업해 유럽·아시아 석권

최만섭 2022. 7. 12. 05:26

나전칠기로 돈 번 청년, 석유회사 ‘셸’ 창업해 유럽·아시아 석권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39] 세계 석유산업 전설 영국 마커스 새뮤얼

입력 2022.07.12 00:11
 
 
 
 
 
 

한 유대인 소년이 나전칠기 등으로 돈을 번 뒤 석유회사를 세워 세계 경제사에 큰 획을 그었다. 런던의 한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1853년 마커스 새뮤얼(Marcus Samuel)이 태어났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모르드카’였다. 새뮤얼의 부모는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11명의 자식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고생하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자기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었다. 특히 열째 아들 새뮤얼은 꾀가 많고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무역업을 권했다.

새뮤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유대인들은 한 시기를 매듭지을 때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다. 아버지의 선물은 아시아행 편도 배편 한 장이었다. 돌아오는 표는 없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을 달았다. 아버지가 이제 늙었으니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장사거리를 여행 중에 궁리해 보라는 부탁이었다. 1871년 18세의 새뮤얼은 인도, 스리랑카, 태국, 싱가포르, 대만, 필리핀, 중국을 두루 거쳐 여행한 후 마지막 기항지 요코하마 항구에 내렸다. 그의 재산이라곤 5파운드가 전부였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없고 기거할 집도 없었다.

세계적 정유회사가 된 셸 - 마커스 새뮤얼은 유조선을 활용한 대량 수송으로 석유 판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경험을 담아 조개 모양 상표를 유조선에 붙였다. 이는 오늘날 세계적 석유 에너지 기업 셸(Shell)의 상표가 됐다. 그는 “낯선 일본의 해안에서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며 어려웠던 시절을 삶의 거울로 삼았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미국 뉴욕의 셸 주유소에서 여성이 주유하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요코하마에 갔을 땐 달랑 5파운드뿐

새뮤얼은 ‘쇼난’이라는 해안의 빈 판잣집에 들어가 며칠 지냈다. 거기에서 그는 일본인들이 갯벌에서 조개 캐는 모습을 보았다. 조개껍데기를 보니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런 조개껍데기로 단추나 장식품을 만들면 아름다운 상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조개껍데기를 열심히 주워 이를 가공해 단추 등을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이걸 자신의 골동품 가게에서 팔았다. 영국인들은 처음 보는 조개 장식품을 진기하게 여겼다. 조개 장식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가게가 번창해 빈민가에 있던 점포를 번화가로 옮겼다. 장사가 잘되자 새뮤얼은 화장대 등 나전칠기 제품을 대량으로 보냈고, 아버지는 이를 도매로 팔았다. 마커스 새뮤얼은 23세인 1876년에 요코하마에 ‘새뮤얼 상회’를 설립했다.

1897년 셸(Shell) 운송·무역회사를 세운 마커스 새뮤얼. 그가 세운 회사는 1907년 네덜란드 왕립석유회사와 합병을 통해 로열더치셸이 됐고, 오늘날 세계 2위 석유회사로 성장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나전칠기 장사로 성공한 새뮤얼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꿈꿨다. 그는 영국과 일본을 오가며 동생 샘을 끌어들여 무역 회사를 차렸다. 영국산 기계, 직물, 공구를 일본과 극동에 팔고, 일본의 쌀, 비단, 도자기, 구리, 석탄 등을 유럽과 중동에 팔았다. 그 무렵 기업인들 사이의 화제는 단연 석유였다. 새뮤얼 역시 1890년 코카서스 지역을 탐사하는 동안 석유의 잠재력을 깨달았다. 때마침 내연기관이 등장해 석유 수요가 급증했다. 록펠러가 석유왕이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난방 연료로 목탄을 쓰고 있었다. 새뮤얼은 이에 착안해 코카서스의 등유와 경유를 일본과 극동에 팔았다. 그때부터 일본과 극동은 석유로 난방하고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 사업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새뮤얼은 동남아 시장을 놓고 미국의 록펠러와 경쟁이 붙었다. 그는 물류 비용을 줄일 방법을 찾았다. 바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는 증기선 몇 척을 빌려 석유통을 가득 채우고 최초로 수에즈운하를 이용한 석유의 대량 운송에 성공했다. 이후 새뮤얼은 극동 항구에 대규모 석유 저장고를 건설하고, 1891년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브니토 석유 회사와 9년간의 독점 계약을 맺어 등유를 극동에 판매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일본까지 석유를 운반하는 게 쉽지 않았다. 석유를 담은 5갤런 통이 쓰러져 석유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면 더러워진 배를 청소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화재 위험이 큰 석유 운송을 선박 회사들이 꺼려 운송 비용도 엄청 비쌌다. 새뮤얼은 고민 끝에 아예 배 전체를 기름 탱크로 만드는 유조선을 착안했다. 그는 전문가에게 설계를 의뢰해 영국 조선 회사에 유조선을 발주했다. 그리고 1892년 유조선 선주가 되었다. 새뮤얼의 유조선은 수에즈운하 통과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산 석유를 외국 배가 운반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새뮤얼은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석유 탐사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왕립 석유 회사를 설립해 수마트라 유전을 개발하고 있었다. 새뮤얼은 운 좋게 인도네시아 최대 유전 개발에 성공해 한꺼번에 8척의 유조선을 발주했다. 이 배들이 세계 최초의 유조선단이었다. 그리고 유조선마다 조개 모양 상표를 붙였다. 요코하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추억을 배에 붙인 것이다. 이후 3년 사이에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유조선이 69척이었는데 그중 65척이 새뮤얼 소유 선박이거나 전세 선박이었다. 새뮤얼은 유조선을 활용한 대량 수송으로 석유 가격을 크게 낮췄다. 록펠러의 해외 독점이 무너진 이유도 수에즈운하로 러시아산 원유를 수송하는 새뮤얼의 유조선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뒤 유조선 사업이 잘되어 1897년 ‘셸(Shell) 운송·무역 회사’를 만들었다.

이후 새뮤얼은 보르네오와 영국에 정유 공장을 지어 유럽과 아시아 석유 시장을 석권해 선박왕 별명을 얻었다. 그 뒤 그는 상업 은행가가 되어 일본 지방채를 팔아 영국 자본의 일본 진출을 도왔다.

새뮤얼은 정계에도 진출해 1891년 런던시 의원이 되었고, 1902년 49세에 런던 시장에 취임해 런던 항만청을 설립했다. 그는 영국의 석유 산업을 일으킨 공로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혼자 조개 줍던 때를 잊은 적 없다”

당시 새뮤얼은 영국 함대에도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할수록 영국인들은 유대인이 석유 산업을 좌우한다며 반발했다. 압력이 심하게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석유 회사를 팔 수밖에 없었던 그는 회사를 매각, 합병할 때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비록 소액 주주일지라도 반드시 그의 자손이 회사 임원이 될 것과 회사가 존속하는 한 조개 모양 상표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셸은 1907년 네덜란드 왕립석유회사(로열더치페트롤리엄)와 합병해 세계 2위 규모의 ‘로열더치셸’이 된다. 최근 회사명을 셸로 변경한 로열더치셸의 상표는 지금도 조개 모양이다.

새뮤얼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며 삶의 거울로 삼았다. 그는 “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런던으로 피란 온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서, 낯선 일본의 해안에 도착해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하곤 했다.

유럽과 아시아 정복한 새뮤얼의 유조선단 - 러시아 석유를 일본에 팔던 마커스 새뮤얼은 배 전체를 기름 탱크로 만드는 유조선을 발주했다. 인도네시아 유전 개발에 성공한 새뮤얼은 8척의 유조선으로 유조선단을 꾸리고 배에 조개 모양 상표를 붙였다. 사진은 1960년대 유조선. /위키피디아

[유대인의 역경 교육]

삶의 시련 이겨낼 수 있게 부모가 일부러 역경을 선물 “어려워도 포기하면 안 된다”

삶에 설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이를 지켜본 아이 역시 시련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결심과 강인한 의지를 품게 된다. 어려운 환경 아래서도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 교육에 아주 좋은 것이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의 행복을 결코 거두어 갈 수 없다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안겨준다. 부모가 강인한 의지로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는 부모의 모습에서 더 큰 자각을 느끼며 성숙해진다. 부모가 어떤 자세로 곤경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오히려 힘든 환경이 가족끼리의 단합과 우애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역경 지수(adversity quotient)’라 하여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절대로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역경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운명은 세찬 파도 가운데 있는 ‘조각배’이며 역경 지수는 이를 뚫고 나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졸업 등 인생의 한 매듭을 지을 때마다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역경을 선물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