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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인사이트] 가면 쓴 나와 민낯인 나, 어느 때 더 진실할 수 있을까

최만섭 2022. 7. 11. 05:28

[아트 인사이트] 가면 쓴 나와 민낯인 나, 어느 때 더 진실할 수 있을까

입력 2022.07.11 03:00
 
 
 
 
 
위쪽 그림은 제임스 앙소르의 1890년 작품 모의(L’Intrigue). 가면을 쓰고 팔짱을 낀 남녀가 주인공이고, 다른 가면을 쓴 사람들과 해골들이 남녀를 둘러싸고 있다. 중국계 미술상과 결혼한 앙소르의 여동생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당시 결혼을 둘러싼 사람들의 입방아를 풍자했다. 아래 사진은 가면을 쓰고 진실을 고백하는 영상을 담아 전시회를 연 작가 질리언 웨어링이 작품‘락앤롤(Rock 'n' Roll) 70’앞에 서있는 모습이다. /앤트워프 왕립 미술관·Juan Garcia

팬데믹 시기,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서는 이 시대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활용하는 다양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지난 달 종료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질리언 웨어링(Gillian Wearing, 1963~) 개인전도 그중 하나다. 모두 마스크를 쓰게 된 시대에 맞춰 1990년대부터 주로 가면을 활용한 작가의 작품 세계 30여 년을 돌아보는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제목도 <Gillian Wearing: wearing mask>이라고 붙였는데, 작가의 이름을 활용한 언어유희다.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은 ‘비디오에 모든 것을 고백하세요. 걱정 말아요, 변장할 테니까. 관심이 있다면 질리언에게 연락하세요’이다. 이 긴 제목은 1994년 타임아웃 런던 잡지에 낸 광고의 문구이기도 하다. 남모를 고민을 간직해왔던 사람들은 그녀에게 연락했고, 작가는 이들이 편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눈동자 부분만 남겨둔 특수 ‘가면’을 입혀주었다. (영어로는 모두 마스크이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작가들의 작품에 활용된 얼굴 전면을 가리는 것을 ‘가면’, 팬데믹으로 인해 쓰는 코와 입을 가리는 것을 ‘마스크’로 구분하여 쓴다) 주로 성적인 것, 몰래 저지른 범죄, 그리고 복수에 대한 참가자들의 고백을 담은 영상으로 작품이 완성되었다. 제작 과정도 중요했지만, 전시 방법에도 철저한 조건이 붙었다. 한 평 남짓한 폐쇄된 방에서 작은 화면으로 상영되어야 하고 소파가 마련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은밀한 공간에서 난데없는 고백을 받은 관객은 심판자가 아니라 공범의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에 숨겨놓은 비슷한 이야기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작가는 가면을 활용하여 비밀과 거짓말, 인식과 실체 사이를 오가는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을 지난 30여 년간 펼쳐왔다. 1990년대의 몰래카메라, 2000년대의 리얼리티 쇼는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였다. 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종이에 써 달라고 부탁한 프로젝트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스케치북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미디어와 현대미술이 끊임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시대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오징어 게임이나 종이의 집처럼 가면 캐릭터가 미디어를 장악하는 것도 흐름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종이의 집 속의 마스크는 항상 자신의 기이한 면모를 뽐내고 싶어했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수염 난 얼굴을 닮았다.

마스크 하면 생각나는 또 다른 작가는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다. 뉴욕현대미술관, 오르세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유독 가면을 쓴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작가는 벨기에 북서쪽 오스텐드에서 평생을 보냈는데, 당시 유명했던 해변 마을로 몰려온 관광객을 상대하던 어머니의 잡화점에는 카니발 가면, 조개 껍데기, 인형 등 이국적인 물건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이 마을 출신으로 별로 배운 것이 없는 촌부였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앙소르는 가게 위층에서 작업에 몰두했다. 영국 출신의 지식인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술과 마약에 중독되어 52세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 가족은 평화롭지 못했고 건강마저 좋지 못했다. 벨기에의 정치적 상황은 암울했다. 가면은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매개체이자, 집안의 비즈니스였고, 마을의 흥미로운 축제이며, 작가가 사회의 부조리를 비꼬며 그리고 싶을 때 자주 등장한 소재였다.

 

질리언 웨어링과 제임스 앙소르, 이들의 작품은 모두 마스크 뒤로 숨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사회적 자아와 내면의 자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예술가 및 다양한 학문 분야의 탐구 대상이었다. ‘조하리의 창’이라는 심리학 이론은 이 간극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영역이다. 이는 사회적 페르소나에 가깝다. 연극할 때 ‘탈’을 쓰는 것처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격,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 말이다. 배우가 무대에 오르듯, 미디어에서 보고 학습한 대로, 그 직업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출근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둘째,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영역이다.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기꺼이 즐기고, 남들에게도 숨겨진 모습이 있을 것을 포착하여 끌어내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는 동안 한국인에게 특히 활성화되었던 영역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마스크를 쓰고 말을 할 때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으니 남을 의식하는 삶으로부터 방어막을 얻은 셈이다. 재택근무를 하거나, 모자까지 푹 눌러쓰면 좀처럼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니 행동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궁금할까 봐 조하리의 나머지 영역 두 개도 간단히 소개하자면, 셋째는 나는 모르는데 남들은 아는 영역, 마지막은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시기가 왔는데 좋다기보다는 도리어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질병 감염의 위험 때문도 있겠지만, 화장도 해야 하고, 면도도 해야 하고, 표정에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벗고 민낯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민낯이 허용되었던 마스크를 벗고 페르소나를 써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마스크를 썼을 때처럼 자유롭게 행동해선 도리어 큰 실수를 할 수 있다. 마스크를 벗고 나이, 건강, 직업, 표정, 성격 등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위와 아래, 동료와 적 등 관계가 구체화된다. 마스크를 계속 쓰고 정보를 가급적 차단시킬지, 지위를 노출시켜 상황을 유리하게 전개해야 할지도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경제도 어려워질 거라고 하니,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보다 끝나가는 지금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어 왔고, 지금의 이 시기가 인류의 진보를 위한 또 다른 도약의 단계라고 생각하며 지혜롭게 이 시기를 넘겨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