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일하지 말고 책 읽으라"… 길게는 1년 이상 독서휴가 보냈죠
입력 : 2022.07.07 03:30
독서당(讀書堂)
▲ ①조선 중종 때의 그림인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일부. 선비들이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과 독서당(점선 안) 모습을 그렸어요. ②강릉 오죽헌이 소장한 율곡 이이의 표준 영정. 독서당에서 공부한 대표적 선비였어요. ③제11대 임금 중종은 지금의 서울 옥수동에 있던 포구인 두모포 근처에 ‘동호(東湖) 독서당’을 지었어요. 현재 옥수동에는‘독서당 터’라는 표석이 있어요. /문화재청·문화체육관광부·성동구청
최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의 그림인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 일본과 미국을 떠돌다 우리나라에 돌아왔대요. 이 그림은 조선 초기 실경산수화(실제 경치를 바탕으로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의 면모를 보여주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여기서 '계회도'란 문인들의 모임인 '계회'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독서당'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글자 그대로 '책 읽는 집'입니다. 조선 시대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했던 기관으로, 그림에 나온 독서당은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습니다.
"출근하지 말고 열심히 독서하거라"
조선 시대에는 관료들에게 책을 읽도록 휴가를 주는 '독서휴가제'가 있었는데 바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였습니다. '사가'란 '휴가를 하사하다'란 뜻이죠. 짧게는 한 달에서 석 달, 길게는 1년 이상 독서 휴가를 보낼 수도 있었어요.
"내가 너희를 집현전 관리에 임명한 것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1426년(세종 8년) 12월 11일, 세종 임금은 권채, 신석견, 남수문이라는 신하 세 명을 불러 말했어요. 집현전이란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으로, 훗날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고려사' '농사직설' '월인천강지곡' 등을 편찬해 바야흐로 조선 문화의 황금기를 펼쳤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근무하는 신하들을 왜 따로 불렀던 걸까요? 세종은 곧 그 이유를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각각 직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급여는 줄 테니) 집에서 열심히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 내 뜻에 맞게 하라." 이것이 '사가독서제'의 시작입니다. 앞으로 나라의 기둥이 될 젊은 관료들이 일상적인 업무에 치이지 않고 독서를 통해 학문을 닦을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죠.
'책 읽는 집' 독서당의 탄생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지금도 '집에서는 공부가 잘 안 된다'며 도서관이나 스터디 카페를 찾는 학생이 많잖아요? 옛날에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집에 있으면 손님들이 찾아와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일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었기에, 세종은 1442년(세종 24년) 신숙주·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이석형에게 독서 휴가를 줄 때 '절에 올라가서 책을 읽는다'는 상사독서(上寺讀書)로 바꿨습니다. 이 절은 지금 서울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였습니다.
하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으로선 불교 사찰에서 선비들을 공부시킨다는 게 좀 마뜩잖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9대 임금 성종은 1492년(성종 23년) 용산 한강변 주변이 탁 트인 곳에 옛 암자를 개조한 '남호(南湖)독서당'을 짓게 했습니다. 최초의 독서당인 이곳에 성종은 직접 쓴 '독서당'이라는 편액(글씨를 써서 문 위에 걸어놓는 액자)을 내려 책 읽는 선비들을 격려했죠.
10대 임금 연산군 때인 1504년(연산군 10년)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그 여파로 독서당은 문을 닫고 사가독서제도 폐지됐습니다.
독서당을 다시 살린 임금이 11대 중종이었습니다. 이번엔 지금의 옥수동에 있던 포구인 두모포 근처에 '동호(東湖)독서당'을 지었죠. 독서당엔 궁중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았고, 좋은 말과 옥으로 장식한 수레를 하사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선발 규정은 엄격했는데, 조광조·주세붕·이황·기대승·이이·정철·이덕형·이항복 등 유명한 학자와 문신들이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현재 서울 옥수동에는 '독서당 터'라는 표석이 있고, 한남동과 행당동을 잇는 도로엔 '독서당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독서당에서 나온 정치 개혁 보고서
1569년(선조 2년), 동호독서당에서 책을 읽던 선비 한 명이 임금에게 정치 개혁 보고서를 지어 올렸습니다. 이 선비는 만 33세의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 이이(1536~1584)였고, 보고서의 이름은 '동호문답'이었습니다. 한 달 남짓 독서 휴가를 마친 율곡은 자기보다 열여섯 살 어린 선조에게 이렇게 진언했습니다. "군주의 마음에 그럭저럭 안일하게만 지내려는 사심이 싹튼다면, 소인들은 반드시 그 틈을 노려 '국가는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율곡은 이어 '군주는 자기 자신부터 수양한 뒤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백성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실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합니다. 잘못된 군역 제도, 과세 제도와 지방 관리의 부정부패 실태를 하나하나 지목하고 "백성의 힘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남북으로 침략이 일어난다면 회오리바람이 낙엽을 쓸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눈앞에 닥친 전란(戰亂)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진행된 실제 역사를 보면 선조 임금은 율곡이 이 책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만 골라 행동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임금에게 이토록 날카로운 충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서당은 조선 선비의 실력과 자신감을 기르던 곳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이후 사가독서제는 점차 흐지부지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란을 겪은 이후 '책 읽을 여유'도 함께 사라진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1426년부터 1773년(영조 49년)까지 모두 48차에 걸쳐 320명의 선비가 독서 휴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동호(東湖)와 남호(南湖)]
우리나라는 호수가 드문 나라입니다. 발해에는 경박호라는 큰 호수가 있었지만, 고려 시대 이후로는 우리 영토에 호수라고 할 만한 호수가 많지 않게 됐죠. 백두산 천지나 한라산 백록담, 동해안의 경포호·영랑호 같은 석호(潟湖·원래 바다였다가 막혀서 생겨난 호수)를 제외하면 자연 호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니까요. 소양호나 충주호는 20세기에 댐 건설로 생겨난 인공 호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옛 선비들은 어떻게 '호수의 정취'를 즐겼을까요?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곳을 호수인 듯 여기는 방법을 썼습니다. 옛 한양도성 근처의 한강물을 보면 흐르는 방향이 바뀌는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성동구 옥수동 근처에서 한번 남서쪽으로 바뀌고, 용산 남쪽에서 또다시 북서쪽으로 바뀌죠. 이 두 곳은 흐름이 바뀌면서 유속(물이 흐르는 속도)이 느려져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는데, 이 때문에 옥수동 근처의 한강을 동호(東湖·동쪽 호수), 용산 근처의 한강을 남호(南湖·남쪽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이 중 '동호'는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 더욱 호수처럼 보이는 곳인데, 율곡 이이가 지은 '동호문답'과 현재 한강 다리 중의 하나인 '동호대교'가 모두 여기서 유래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