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 뒤로 묶인채... 러軍의 민간인 학살, 세계가 분노
유엔과 서방은 범죄 책임 조사와 추가 제재 공언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에서 러시아군이 퇴각한 뒤 이들이 점령지의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집단 학살과 처형, 성폭력, 고문 등의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제사회가 경악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특히 키이우 북서쪽 37km 지점에 있는 소도시 ‘부차(Bucha)’의 비극은 러시아군이 자행한 만행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두 손이 뒤로 결박된 채 후두부에 총을 맞은 민간인들의 시신, 검은 봉투에 담은 시신들을 아무렇게나 파묻은 집단 매장지 등이 확인됐다.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수사 중인 이리나 베네딕토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지난 3일(현지 시각) 러시아군 퇴각 이후 부차와 호스토멜, 이르핀 등 키이우 주변 30여 소도시와 마을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군에 잔혹하게 살해된 민간인 시신을 최소 410구 이상 수습했다고 밝혔다. 부차에서는 거리 곳곳에서 살해된 민간인 시신이 발견됐다. 눈이 가려진 채 손이 뒤로 묶인 시신 18구가 있었고, 성당 근처에 시신 280여 구를 집단 매장한 곳도 나왔다고 AFP통신과 CNN 등이 전했다. 러시아군이 지휘부로 쓰던 건물에서도 시신 10여 구가 나왔다.
서방 지도자들은 일제히 러시아를 강력히 비난하며,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한 범죄 혐의 조사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러시아군이 키이우 지역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전쟁 범죄 증거를 수집해 ICC에 제출하는 것을 돕고, 대(對)러시아 추가 제재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부차에서 나온 희생자 사진들은 수십 년간 유럽에서 보지 못했던 민간인에 대한 잔혹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나는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들의 모습에 깊이 충격받았다”며 “실질적 책임 추궁으로 이어질 독립적 수사가 필수”라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CNN방송에서 “(부차의 모습에) 명치를 얻어맞은 것 같다”고 말하며 추가 제재를 시사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 점령지에서 벌어진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집단 학살(genocide)’로 규정했다. 그는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CBS방송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란) 국가와 국민 전체를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이고 러시아 연방의 정책에 지배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파괴와 몰살을 당하는 이유”라며 “이런 일이 21세기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집단 학살은 반인도 범죄, 전쟁 범죄, 침략 범죄와 함께 국제형사재판소가 담당하는 ‘국제 공동체의 가장 중대한 4대 범죄’ 중 하나다. ICC 설립 근거가 되는 로마 규정을 보면 전쟁 범죄에는 민간인이나 병원 등에 대한 공격과 약탈, 항복한 전투원 살해 등이 포함된다. 집단 학살은 이를 넘어서 국민적,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를 갖고 그 구성원을 살해하거나 위해를 가하거나 그 집단의 아동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행위를 뜻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집단 학살을 언급하고 나선 것은 부차, 호스토멜 등에서 확인된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가 그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은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부터 이 지역을 발판 삼아 키이우 함락에 나서려 했다. 5주간 격전을 치르는 동안 우크라이나 당국도 이곳 상황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1일 러시아군이 최종적으로 퇴각한 후에야 AFP와 BBC 등의 보도진이 처음 부차에 들어가 수백m 거리에 최소 20구의 민간인 시신이 흩어져 있는 충격적 모습을 세계에 전했다.
부차 외곽에서는 러시아군이 파놓은 참호에서 수많은 시신이 발견됐다. 현장의 CNN 보도진은 “대부분 시신은 검은 봉투에 담겨 있지만 일부는 팔다리가 튀어나와 있는 등 일부만 매장돼 있었다”며 “최소 10여 구의 시신을 볼 수 있었고, 더 많은 시신이 아래에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시신 일부는 귀가 잘리거나 치아가 강제로 뽑히는 등 고문당한 흔적이 있다”며 “심지어 14~16세 청소년들의 시신도 나왔다”고 밝혔다. 이르핀에서는 철수하던 러시아군이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항의하는 이들을 전차로 밀고 지나갔다는 증언이 나왔다.
러시아군이 왜 민간인 학살에 나섰는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군에 대한 저항 활동을 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민을 제거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단순히 약탈과 성폭행을 위해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범죄의 정도를 확인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목격자들의 협조가 필요하지만 너무 충격을 받은 이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ICC에 러시아군의 광범위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미 조사를 요청한 상태다.
이리나 베레슈추크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러시아 점령 기간 처형된 각 지역 도시와 마을의 시장이 11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또 동남부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마리우폴을 한 달 이상 포위 공격하면서 시 당국 추산 최소 5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를 내고 있다. 러시아군은 이곳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폭격했고 ‘어린이’라고 쓰인 극장 대피소까지 포격해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300명 이상이 떼죽음을 당했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러시아의 책임을 묻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인도적 지원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비겁하게 살해한 민간인 수백 명에 대해 러시아는 해명해야 한다”고 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푸틴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서방 동맹국들이 수일 내에 추가 제재에 합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 행정부 당국자들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 강화를 논의하고 있다”며 러시아와 교역하는 국가에 대한 ‘2차 제재’나 광업·교통·일부 금융업 등 아직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추가 제재가 가능하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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