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비가 절에 불을 질렀기로서니 왜 수사를 하는가!”

최만섭 2022. 3. 30. 05:28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비가 절에 불을 질렀기로서니 왜 수사를 하는가!”

294. 흥천사 동종의 운명과 조선 선비 불교 탄압사

‘흥천사명 동종’에 새겨진 문양. 세조 때 만든 이 대종(大鐘)은 운명이 기구했다. 조선초기 왕실 종교로 융성했던 불교는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실질적로 유림들의 테러 대상이 됐다. 서울 정동에 있던 흥천사도 수시로 방화에 시달렸고 많은 절들이 유생들 방화로 폐사됐다. 흥천사 종은 폐사지를 떠나 공무원들 출퇴근 시보용 종으로 쓰이기도 했다./박종인
입력 2022.03.30 03:00
서울 덕수궁에는 커다란 종이 야외에 전시돼 있었다. 지금은 경복궁에서 복원과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공식 명칭은 ‘흥천사명 동종’이고 대한민국 보물 제1460호다. 종 운명이 참 기구하다. 원래 종은 덕수궁 자리에 있던 흥천사라는 절에 걸려 있었다. 그랬다가 남대문에 걸렸다가 쓰러져 버려졌다가 마침내는 경복궁 광화문에 걸렸다가 식민시대 이왕직박물관에 전시됐다가 해방이 되고 그 자리 덕수궁에 서 있다가 지금은 영문도 모른 채 경복궁에 걸릴 예정으로 수리 중이다. 이 글은 이 흥천사 동종으로 상징되는 조선 선비들의 불교 말살 작업에 관한 이야기다.

294. 흥천사 동종의 운명과 조선 선비 불교 탄압사

조선왕실의 종교, 불교

조선은 이성계가 지휘하는 군인과 정도전이 이끄는 신진 사대부 연합 세력이 건국했다. 고려 말 부패한 불교 세력을 본 신진 사대부는 불교 자체를 혐오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은 독실한 불교도들이었다. 불교를 옹호하는 왕실과 불교를 반(反)성리학적 이단으로 공격하는 사대부는 늘 갈등을 빚었다.

새 나라를 건국하고 5년 뒤 태조 이성계는 절을 지었다. 절 이름은 흥천사다. 장소는 서울 취현방(聚賢坊)이다. 지금 정동이다. 취현방에는 왕릉이 있었다. 정릉이다. 1396년 죽은 왕비 강씨 무덤이다. 이듬해 창건된 흥천사는 정릉을 지키는 원찰(願刹)이다. 이후 조선 왕릉 옆에는 늘상 원찰이 들어섰다. 태조는 양산 통도사에 있던 석가모니 진신사리 4과(顆)를 모셔와 흥천사 사리각에 봉안했다.

손자 세종은 훗날 야밤에 내시를 시켜 그 사리를 궁궐 내 내불당에 따로 봉안했다. 세종은 또 “한나라 이후 역대 임금이 부처를 섬겼으니 내가 믿어서 뭐가 잘못인가”라며 노회한 관료들 속을 긁기도 했다.(1419년 8월 23일, 1441년 윤11월 14일 ‘세종실록’) 세종이 벌인 훈민정음 사업을 아들 세조가 계승한 방식도 불경 언해였다.

덕수궁에 있었던 흥천사 동종

테러의 시작, 연산군

발화점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재임 후반부가 되면서 불교와 유학에 관심을 잃었다. 재위 10년째인 1504년 연산군은 “세조가 창건한 절이지만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원각사(圓覺寺)를 폐사시키라”고 명했다. 한성 내 사찰 훼철은 태조부터 성종 때까지 유생들 상소에 단골로 오른 레퍼토리였지만 단 한 번도 채택되지 못한 이슈였다. 폭압적인 연산군 독재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관료들은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적극 동조했다. 절이 사라졌다. 이듬해 2월 원각사 터에 기생 수천명을 기르는 장악원이 들어섰다.(1504년 12월 26일, 1505년 2월 21일 ‘연산군일기’)

불교 제거에 성공했다고 박수를 치던 성리학 세력도 폭정은 피하지 못했다. 1년 뒤 연산군은 성리학 성지인 문묘(文廟)에서 유학 성현 위패를 철거하고 동물 우리로 만들어버렸다.(1506년 9월 2일 ‘연산군일기’)

그렇게 모든 규범이 와해된 상황에서 정동 흥천사와 태조 이성계가 인근 연희방에 세운 또 다른 절 흥덕사가 유생들의 방화 테러로 불구덩이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연산군은 이를 ‘불문에 부쳤다.’(1510년 4월 6일 ‘중종실록’) 한성 도성 내 왕실 사찰이 그렇게 전멸했다.

‘미친 아이들’의 방화

1506년 9월 2일 중종이 즉위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 폭정에 맞서 관료들이 일으킨 쿠데타다. 재임 초기 중종은 권력이 없었다. 쿠데타 당일에도 중종은 그 실체를 몰라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쿠데타 세력 요구에 따라 연산군 처남 신수근의 딸인 아내와 이혼을 한 그런 왕이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7권 중종조 고사본말) 그런 허수아비 왕에게 폭정시대를 청산하겠다는 도학 정치가들이 나타나 개혁을 요구했다. 개혁은 교조적인 성리학 일변도였고, 반불교적인 요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510년 3월 27일 왕실에서 흥천사에 내시를 보냈다. 유생들이 흥천사 물건을 훔친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하러 나온 관리였다. 내시가 나타나자 유생들은 내시를 돌덩이로 내려치며 물건을 훔쳐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밤 흥천사 사리각이 불탔다.(1510년 3월 28일 ‘중종실록’)

다른 사람도 아닌 태조 이성계가 만들고, 다른 물건도 아닌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보관된 건물이었다. 연산군 때도 방화를 면한 건물이었다. 사흘 뒤 중종이 대신들을 소집했다. “예로부터 유생들은 ‘미친 아이들(狂童·광동)’이라더니, 어찌 국가 재산을 불태우는가. 수사하라.” 중종은 유생들을 ‘미친 아이’라고 불렀다.

 

‘왜 우리를 수사하는가’

‘미친 아이’는 방화를 한 유생들만이 아니었다. 이 ‘흥천사 방화 테러’ 초기 수사 과정 일부 기록을 살펴보자.

먼저 실록 사관(史官). “절에 불이 났다고 유생을 심문하다니, 이단(異端)을 두둔하는 것과 다름없구나.”(1510년 3월 30일 ‘중종실록’) 나흘 뒤 승정원이 보고했다. “불 붙인 물건을 들고 절로 들어가는 유생을 본 목격자가 있다. 하지만 미약한 유생이 형벌을 받다 죽을까 두렵다.” 중종이 답했다. “중범죄다. 수사하라.”(4월 4일)

이틀 뒤 손난직이라는 성균관 생원이 상소했다. “석가모니 부도가 하루 저녁에 다 타 버렸으니 천백 년의 쾌거요 유가(儒家)의 경사이며 종사(宗社)의 복이다. 그런데 수사를 받고 있는 수백 유생들은 기운을 잃어 맥이 풀려 있다.” 성균관 교사 유운은 이날 이렇게 주장했다. “절은 왕실과 관계없는데 왜 내시를 보내 일을 만드셨는가. 실수하신 거다. 폭군 연산군도 흥천사, 흥덕사 방화를 묵인했다. 예로부터 임금이 사사롭게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 화가 반드시 종사를 전복시키고야 만다.”

‘종사 전복’까지 들먹이는 관리들에게 중종이 놀라서 답했다. “불이 이웃에 번지면 인명 피해가 생긴다. 이게 사사롭다고?”(4월 6일)

하지만 힘없는 권력자였다. 홍위병처럼 사방에서 달려드는 유학자들 공세에 사건은 흐지부지돼 버렸다. 2년 뒤 중종이 이리 명했다. “흥천사 부지를 사대부들에게 나눠 주라.”(1512년 6월 15일 ‘중종실록’) 흥천사는 폐사됐다.

집요했던 혐오와 무시

불교 흔적을 발본색원하겠다는 관리들 의지는 집요했다. 1519년 국왕 경연 교사인 시강관 이청이 이렇게 말했다. “부처는 만세 명교(名敎·유학)의 죄인이다. 간신들이 협조해 왕실에서 불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니 원각사 터에 남아 있는 비석을 부수게 해 달라.”(1519년 6월 21일 ‘중종실록’) 연산군 때 기생학교로 변한 원각사지의 비석을 없애버리자는 말이었다. 중종은 “굳이 내가 명해야 하겠는가?”라며 즉답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생활했던 경기도 양주 회암사도 테러 대상이 됐다. 1566년 불교 신자였던 명종이 이렇게 말했다. “듣자 하니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고 한다. 놀랍다. 진정한 유생이라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당연히 뽑아버려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보호하고 아끼는 의도를 보이니 무슨 일인가.”(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

우려대로였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5년 화포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던 군기시 관리가 선조에게 이리 보고했다.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하략).”(1595년 6월 4일 ‘선조실록’) 그 30년 사이에 회암사가 방화된 것이다. 2001년 회암사지 발굴조사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폐사 시점의 건물지 대부분이 화재로 인해 폐기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회암사1 : 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p238) 1821년 경기도 광주에 사는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회암사터에 있던 무학대사 부도탑과 비석을 부수고 자기 아비 묘를 쓰면서 회암사 수난은 정점을 찍었다.(1821년 7월 23일 ‘순조실록’)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 비석과 부도탑(뒤쪽). 1821년 한 유생이 아버지 묘를 쓴다며 부숴버려 복원한 비석이다./박종인

기구했던 절집 종들

1536년 흥천사 터에 남아 있던 거대한 동종(銅鐘)이 남대문 문루로 옮겨졌다. 세조 때 만든 종이다. 또 연산군 때 폐사된 원각사 동종은 동대문으로 옮겨졌다. 원각사 종은 동대문 근처에 종각을 지어 그곳에 매달았다. 이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보신각 옛 종이다. 이후 종각은 헐렸지만 종은 오래도록 땅바닥에 방치돼 있었다. 옮긴 목적은 ‘성 바깥에서 출퇴근하는 관리들이 종소리를 듣지 못해 지각을 하므로’였다.(1541년 6월 1일 ‘중종실록’) 출퇴근 시보 역할을 했던 이 신생 왕국 조선 왕실의 성물(聖物)은 1985년 기능을 정지하고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남대문에 걸렸던 흥천사 동종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으로 옮겨 걸었다. 그리고 식민시대 초인 1910년 이왕가박물관이 그 종을 구입해 창경궁에 진열했다. 1938년 덕수궁에 이왕가미술관이 신설되면서 최근까지 덕수궁 안에 전시돼 있었다. 긴 세월이었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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