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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정은 日軍 위문단 보내고, 병사는 中·日로 갈려 총을 겨눴다

최만섭 2022. 3. 16. 05:46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정은 日軍 위문단 보내고, 병사는 中·日로 갈려 총을 겨눴다

294.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⑤무능한 지도자 탓에신음하는 조선

1895년 3월 19일 조선정부는 군무대신 조희연을 단장으로 한 일본군 위문단을 파견했다. 그달 19일 위문단은 여순 옆 금주성 일본군 사령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가운데 군복 입은 사람이 조희연이다. /일본국회도서관
입력 2022.03.16 03:00
 
 
1894년 2월 15일(양력) 호남 고부에서 터진 동학농민전쟁은 치안력이 전무했던 조선정부로 하여금 청나라 군사를 부르게 만들었다. 조선 진출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즉각 ‘동시출병’이라는 천진조약(1885)을 근거로 조선으로 대규모 군단을 파병했다. 풍도 앞바다에서 개시된 전쟁은 성환으로 상륙했고 이어 평양을 불태우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반도를 집어삼켰다. 신생국 일본에 전통 대국 중국이 참패했다. 패배 원인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부패였고, 근대에 대한 무지였다. 중일 양국을 조선으로 불러들인 조선정부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4.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⑤무능한 권력층과 신음하는 조선

남도의 죽창과 궁궐의 아리랑

1873년 겨울밤 조선 26대 왕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언했다. 1863년 등극 후 10년 동안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휘두르던 권력을 아들이 직접 행사하겠다는 선언이다. 그 10년 동안 대원군이 해오던 개혁작업(1864년 갑자년에 시작한 ‘갑자유신’이라고 한다)은 그날 밤 멈췄다. 노론과 세도가문 일색이던 정치판은 노론과 고종 척족인 민씨 세력으로 채워졌고 백성을 착취하던 환곡과 전정, 군정 개혁도 멎었다. 친정 선언 이듬해 민비가 고대하던 아들이 태어났다. 훗날 왕위 아니 황제위를 물려받은 순종 이척이다. 매천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원자(元子)가 탄생한 이후 복을 비는 궁중 기도제사가 절도가 사라졌다. 왕도 마음대로 연회를 즐겨 경비가 모자랐다. 국왕 부부가 하루에 천금을 소모해 지탱할 수 없으므로 호조와 선혜청 공금을 공공연히 가져다 썼다. 1년도 안 돼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동났다. 이로부터 매관매직의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황현, ‘매천야록’ 1권 上 3.고종·민비의 유연(遊宴)과 매관매직의 발단)

음울했던 1894년도 부패는 여전했다. 그해 음력 3월 1일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사 작업은 세 부서에서 맡았는데 재정 담당 호조(戶曹)와 군사조직인 친군영, 통위영이었다.(1894년 3월 1일 ‘고종실록’)

황현에 따르면 이보다 두 달 전인 그해 정월 고종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놀란 고종이 내린 결정이 창덕궁 이어였다. 이미 남도에서는 동학으로 상황이 급박했지만 궁궐 수리는 더욱 열을 올렸다. 그렇게 군사조직을 토목공사에 투입시키고 고종은, 놀았다. 밤이면 전등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아리랑’을 부르게 했고, 처조카뻘 민영주는 광대들 등수를 매겨 궁궐에서 만든 금은으로 시상했다.(황현, 앞 책 2권, 1894년① 19.궁중의 아리랑 타령)

고종 정권이 전쟁에 대처한 자세

부패는 민란을 불렀고 민란은 전쟁을 불렀다. 민비가 조카 민영소를 통해 뒤를 봐주던 조병갑이 농민 분노를 폭발시켰고, 농민 세력은 조병갑은 물론 부패의 화신으로 낙인찍은 선혜청 당상 민영준(민영휘)을 죽이겠다고 낫을 갈았다. 민비는 이들을 ‘흉도(凶徒)’라고 부르며 토벌대를 보냈다고 민영소에게 편지를 썼다.(‘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번호 ‘고궁 1150′)

고부 민란이 터지고 이틀이 지난 2월 17일, 고종은 그해 11월 7일 북경에서 벌어질 청황실 서태후 환갑연에 보낼 축하 사절을 선정했다. 정사는 이승순(李承純), 부사는 조병우(趙秉友)였다.(1894년 음1월 12일 ‘승정원일기’) 그런데 민비가 어느 날 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어떠하든지 우리 민가(閔家)는 청국 황제 모자(母子) 생일에 가 인사하는 것이 좋으니, 가는 것이 좋다.’(국립고궁박물관 ‘고궁1187′) 5월 28일 부사 조병우가 상소를 올리고 부사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그날 고종은 공석이 된 부사에 처조카 민영철을 임명했다.(1894년 음4월 24일 ‘고종실록’)

7월 12일 민영철이 북경으로 떠날 때 민비는 공식 조공품 외 금은보화를 더 보냈다. 11월 7일 생일 전쟁 와중에 도착한 조선 사신을 본 서태후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사신단을 황실 좌석에 앉혔다.(황현, 앞 책 2권, 1894년⑥ 3.성절사 북경 파견) 조선 사신과 천조국 태후가 유희를 즐기던 그 11월 7일, 일본 육군 제2군은 여순 시가지에 무혈 입성해 행진을 벌이며 도시 외곽 북양함대 사령부 섬멸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바보 천치가 쓴 각본으로 미치광이가 연출하는 연극 같았다.

“총을 내려놓으라”

연극은 1막으로 끝나지 않았다. 민영철이 중국으로 떠나고 11일이 지났다. 7월 23일 새벽 4시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동쪽 건춘문에서 궁궐 수비대인 시위대(侍衛隊)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시위대 병력 500명이 건춘문에 집중해 있는 사이 서쪽 영추문이 폭약으로 파괴되고 일본군이 난입했다. 일본군은 궁궐 북쪽 끝 건청궁으로 진입해 고종을 위협했다.

평양군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군기와 화력이 조선 제일이었다. 독일제 연발소총으로 무장했고 사기도 충만했다. 그런데 오전 5시 30분쯤 고종으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1894년 음6월 21일 ‘고종실록’) ‘비록 천한 무리(賤流·천류)이나 국은(國恩)을 입었기에 단결해 결사항전하던’ 조선군은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했다.(황현, 앞 책 2권 1894년 ③ 14.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일본군은 크루프 기관포 8문, 개틀링건 8문, 각종 소총 3000정과 무수한 잡무기, 군마 15필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이때 고종이 몸소 나와서 “쏜 일이 없기 때문에 빼앗을 이유가 없다”고 무기 몰수 유예를 요청했다. 요청은 무시됐다. 일본군은 ‘수송병 240명만으로는 운반이 불가능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여단보고’ 보고철 등: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65, 재인용) 친정 선언 이후 고종이 지방군을 축소시키면서까지 육성한 궁궐 파수대는 반나절 실전 투입을 끝으로 왕국에서 사라졌다.

1894년 9월 평양전투에서 촬영한 사진(추정). 일본군에 편입된 조선군이 청나라 포로를 감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映像が語る日韓倂合史(영상으로 말하는 일한병합사)

中·日 장난감이 된 조선정부

다음 날인 7월 24일 대원군이 일본군 등에 업혀 정치에 복귀했다. 그날 아직까지 권력을 잡고 있던 여흥 민씨들이 대거 축출됐다.(1894년 음6월 22일 ‘일성록’) 7월 25일 일본군은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했다. 또 이틀이 지난 7월 27일 조선정부는 일본 측 요구에 의해 조선이 중국 속국임을 규정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 폐기를 선언했다.

그러자 8월 4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임오군란 이후 그때까지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원세개에게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직함과 권한을 유지하라고 명했다.(권혁수, ‘이홍장의 조선 인식과 정책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논문, 1999, p301~302) 민영준·고종과 담합해 중국군 파병을 주도했던 원세개는 이미 경복궁 공격 나흘 전인 7월 19일 본국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그러자 8월 26일 일본은 조선 정부와 ‘조일양국맹약’을 체결했다. ‘병력 및 무기 수송, 군량 같은 일본군 병참을 조선이 책임진다.’ 눈 깜짝할 새에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이 돼 버렸고 그 대가가 실질적인 대청 선전포고가 돼 버렸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 일본이 독립시켜 버린 것이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평양성전투 판화 부분. '고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청군에 소속된 조선군이 그려져 있다. 조선군은 청일 양국으로 나뉘어 평양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했다. /영국박물관

서로에게 총을 쏜 조선군

그리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선군 화살이 어둠 속에서 날아왔다. 중국군은 이 유치한 토박이 병사들을 야간전에 몰아넣고 채찍을 때렸다.(미국 뉴욕월드지 종군기자 J. 크릴먼, ‘On The Great Highway’, 로드롭 출판, 보스턴, 1901, p49)

8월 4일 원세개의 복귀를 명한 이홍장은 동시에 평안도관찰사 민병석에게 “신임 관찰사가 와도 업무 인계를 하지 말고 중국군 작전에 협조하라”고 ‘지시했다’.(‘평양전신국을 통해 평안도 민병석에게 보낸 전보’: 권혁수, 앞 논문, p303, 재인용) 민병석은 명령을 준수해 신임 관찰사 김만식을 무시하고 조선군을 동원해 청군 작전에 참가하고 이홍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평양전투를 앞두고 고종은 이두황이 이끄는 조선군 장용영 부대(장교 3명, 부사관 50명, 역관 1명, 기마 13두)를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시켰다. 조일공수동맹에 따른 조치였다. 이에 따라 ‘개성에서는 일본과 중국 양쪽에 소속된 조선군끼리 교전이 벌어졌다. (청나라 명을 따르는)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이 지휘하는 평양 지방군 15명이 나포됐다.’(‘명치27~28년 일청전사’ 2권, 참모본부, 동경인쇄, 도쿄, 1904, p200) 사람들은 옛 관찰사 민병석을 청(淸) 감사, 신임 김만식을 왜(倭) 감사라고 불렀다.(황현, 앞책 2권 1894년 ⑤ 8.청국군의 평양 진주) 평양에서 일본군에 잡힌 조선군 포로 12명은 처형당했다. 처형 방법은 ‘참형’, 칼로 목을 베 죽였다.(‘일청전쟁실기’4 ‘평양 함락사’, 박문관, 1894, p19)

대원군과 고종은 이 짝짝 갈라진 조선군의 분열과 몰락을 더 부채질했다. 부자(父子)는 각각 다른 루트를 통해 “원병을 보내주신 청나라에 무한 감사”라는 편지를 평양 중국군에 보냈다가 이 편지를 일본군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 편지를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총리대신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에게 보여주자 “제발 珠淵(주연·고종의 별호)이라고 적힌 편지만은 돌려달라”며 애원하는 일도 벌어졌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6. 내정이혁의 건 (6)조선정황 보고에 관한 건, 1894년 12월 28일)

정규군 간 전투에 어처구니없이 희생된 조선군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전황이 격화되면서 청일 양국은 이후 상대국 포로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는 결국 1894년 11월 21일 일본군이 여순을 함락하며 벌인 대학살사건으로 연결됐다. 여순학살사건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만방에 폭로됐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출병 명분으로 내걸었던 동학 민란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진압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민란을 진압한 조선정부는 이듬해 3월 20일 군무대신 조희연을 단장으로 하는 일본군 위문단을 전선으로 파견했다.(1895년 음2월 14일 ‘고종실록’)

청나라 병사 포로를 참수하는 일본군. '폭행 청병 참수도'라는 판화 부분이다.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일본 측 홍보와 달리 일본의 전시 행동에는 근대와 전 근대가 혼재돼 있었다. /영국박물관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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