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아무튼, 주말] 밀레가 되고 싶었던 가난한 화가, 그녀로 하여금 ‘나목’을 쓰게 했다

최만섭 2022. 1. 1. 06:41

 

[아무튼, 주말] 밀레가 되고 싶었던 가난한 화가, 그녀로 하여금 ‘나목’을 쓰게 했다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소설로 승화된 국민화가의 삶
화가 박수근과 소설가 박완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입력 2022.01.01 03:00
 
 
 
 
 
박수근 '나무와 여인'(1964년). 최근 방탄소년단 RM이 전시장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서 유명세를 탄 그림이다. /개인소장

내가 근무하는 덕수궁 안 미술관은 요즘 강추위에도, 코로나에도 연일 사람들로 붐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처음으로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10시 미술관이 개관하기도 전에 야외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객들을 바라보면, 추위를 녹이는 그들의 열정에 감복하게 된다.

박수근은 1965년 5월 작고했는데, 같은 해 10월 유작전이 열렸다. 신문기사를 접하고 이 전시회에 갔다가 박수근 작품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가 소설가 박완서(1931~2011)였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안고서, 박수근을 소재로 한 소설 ‘나목(裸木)’을 썼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70년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되면서, 주부 박완서는 처음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나이 39세가 될 때까지 주부로 살던 사람이 이런 소설을 썼을 리가 없다며, 잡지사에서 집에 찾아가 진짜 박완서가 쓴 것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 열리는 전시에도 1965년 유작전에 나와서 박완서가 보았을 작품이 24점이나 걸려있다. 전체 출품작 174점 중 일부이다. 그래서 내심 기대해본다. 혹시 모르지 않나. 또 다른 누군가가 박완서와 같은 감동을 받아서, 그 어떤 색다른 일을 해낼지.

박수근 수채화 '고목'(1961년). 나무 두 그루를 담은 과감한 구도에 가는 붓질로 바탕을 칠했다. /개인 소장

박완서와 박수근의 만남

처음 박완서와 박수근이 만난 것은 1951년 겨울, 미군 PX에서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라 많은 사람이 대구로 부산으로 피란 갔기 때문에 서울은 거의 ‘공동화(空洞化)’ 상태였다. 일자리라고는 거의 찾을 수 없던 때, 박완서는 ‘소녀 가장’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어릴 때 돌아가신 데다가, 전쟁 중에 오빠와 숙부가 비명횡사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당당히 합격하여 여대생이 되나 싶었지만, 한 달도 채 안 되어 전쟁을 맞아버렸고, 그것이 그녀의 삶을 졸지에 나락으로 빠뜨렸다.

세상의 불행을 때려 부은 것 같은 자신의 삶을 경멸하며 거의 불행감에 도취된 채, 박완서는 현재의 휘황찬란한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있던 미군 PX 기념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미군을 상대로 서툰 영어로 일종의 ‘호객’ 행위를 박완서가 하면, 뒤에서 박수근이 스카프나 손수건 귀퉁이에 미군 애인이나 가족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 넣는 식이었다. 이 위대한 소설가와 화가가 ‘콤비’를 이루어, 1951년 겨울 서울의 쇼핑센터 구석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니!

1954년 6월 22일 촬영한 서울 미군 PX 전경(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한국저작권위원회

20세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박완서에게 이 상황은 너무나 치욕적으로 여겨졌다. 이 치욕의 대가로 밥벌이를 하는 ‘간판장이’들에게 쓸데없이 분풀이를 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박완서는 그런 온갖 굴욕을 감내하면서도,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우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소박한 임무를 다하는 박수근의 의연함을 보고, 차차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조금의 우월의식도 없이, 그렇다고 현실에 굴복하는 일도 없이, 시대를 버텨내는 화가 박수근을 통해 박완서는 처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박완서는 자신만이 불행하다는 의식에서 빠져나와, 점차 주변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고, 각자의 고난을 이겨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을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박완서는 박수근에게서 그 특유의 ‘따뜻한 시선’을 배운 것이다.

박수근 '판잣집'(1950년대 후반).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기를 꿈꾼 박수근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박수근과 쌍벽을 이루는 ‘국민 화가’ 이중섭보다 두 살 위다. 거의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국민 화가는 성장 배경도, 성품도 참 극단적으로 달랐다. 이중섭이 부잣집 막내아들 출신이라면, 박수근은 가난한 집 장남 출신이었다. 이중섭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천재형 화가라면, 박수근은 책임감 강하고 끈질긴 노력형 화가였다. 박수근은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다. 이중섭은 물론이고 웬만한 집안 출신의 화가들이 너도나도 일본 유학을 떠났을 때, 박수근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초졸에 독학. 그것이 박수근의 이력이었다.

대신 박수근은 굴하지 않는 인간성을 지녔다. 열두 살 때 화집에서 밀레의 작품 ‘만종’을 보고 마음 깊이 감동받은 후, 그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자신을 위해 빌었다. “나도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밀레가 그린 작품은 대부분 평범한 농민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이 노동을 하다가 잠시 일손을 멈추고, 멀리서 들려오는 ‘만종’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순간! 그것을 밀레는 거의 ‘종교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신성하게 그렸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한순간에 깃든 진실과 고귀함!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화가가 되었으면… 그것이 열두 살 박수근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소망을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끝내 잊지 않았다.

 
박수근 ‘절구질 하는 여인'(1957).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인고의 세월을 견딘 보통 사람에 대한 헌사

1940년 상사병에 걸릴 만큼 사랑했던 동네 여인과 결혼하여, 박수근은 네 자녀를 둔 가장(家長)이 되었다. 전쟁 중 목숨의 위협 속에 인민군을 피해 혼자 뒷문으로 빠져나와 월남, 군산에서 부두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1951년 극적으로 서울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이후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번 돈으로 창신동에 방 두 개, 마루 하나가 딸린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방 하나는 세를 내줬기에, 여섯 식구는 단칸방과 마루에서 생활했다.

박수근은 이 집 마루에서 평생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63년까지 10년간 이 집에 살면서, 이 대청마루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젤도 없이, 마룻바닥 한쪽 구석에 군용 천막을 깔고, 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일매일 그렸다. 4시 이후에는 명동으로 나가 저녁이 지나 돌아오는 일상이었다.

서울 창신동 집 마루에 앉아있는 박수근과 가족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이 마루는 가족의 생활 공간이자 박수근의 아틀리에이면서, 또 갤러리 역할도 했다. 전후(戰後) 한국에 있던 미국인 컬렉터들이 직접 찾아와 늘어놓은 작품을 사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청마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곳이 박수근 작품의 소재 대부분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글을 모르는 ‘기름장수’의 아들 편지를 읽어주는 대신 기름을 선물받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대문만 열면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동네 사람,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박수근의 작품 소재는 거의 다 이 마루에서 반경 몇백미터 영역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는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소재로, 그들의 선하고 진실한 일상을 화폭에 옮겼다.

박수근 ‘기름 장수'(1953). 기름병을 머리에 이고 어정어정 걸어가는 기름 장수의 뒷모습을 포착했다. /개인 소장

사실 평범하고 단순한 것을 잘 그리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기름병을 머리에 이고, 손으로 광주리를 받칠 필요도 없이 능숙한 자세로 어정어정 걸어가는 기름장수의 뒷모습! 이것이 감동을 주려면, 화가는 오랜 노동으로 변형된, 인물의 특징적인 골격 구조를 완전히 파악해야만 한다. 단순한 선만으로도 그런 골격을 표현해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오랜 세월 ‘풍상’을 겪으며 오늘을 살아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박수근은 작품의 표면 효과 자체가 그러한 ‘풍상’을 담아내기를 바랐다. 그는 적게는 4겹에서 많게는 22겹, 보통은 10겹 정도의 유화물감을 바르고 또 발라서, 작품 표면이 마치 바위나 돌, 오래된 나무의 껍질처럼 보이도록 의도했다. 제작 과정도 인고(忍苦)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만들어진 결과물도 오랜 풍상을 겪은 자연물 그대로 딱딱하고 거칠거칠하다. 유화물감으로 만들어낸 효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생(生)의 무게를 견뎌낸 모든 존재에게 존경과 헌사를 보내고자 했다. 그리고 화가 자신도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기를 끊임없이 다짐했을 것이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1962). /리움미술관

박완서가 바라본 박수근

1952년 미군 PX 일을 그만두고 주부로 생활하면서, 박완서는 한동안 박수근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1965년 박수근 유작전에서 그의 작품을 맞닥뜨리고 충격을 받았다. ‘박수근은 결국 해냈구나!’ 하는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1952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던 시절, 박수근은 결국 화가로, 생활인으로 살아내면서, 박완서의 표현대로 “보석같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저 보통의 평범한 모든 이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진심어린 찬사를 건넸기에, 더욱 빛을 내는 그런 작품을.

박수근 ‘꽃피는 시절'(1961). 얼핏 앙상한 가지만 남은 헐벗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분홍 꽃잎과 연둣빛 이파리를 품고 있다. 박완서의 표현대로, “봄에의 믿음”을 간직한 겨울나무다. /개인 소장

그 충격이 박완서로 하여금 ‘나목’을 쓰게 했다. 그녀는 소설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1·4 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박수근은 어찌 그런 시대를 예술가로 살아냈던 걸까.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1961). /개인 소장

유작전 이후 45년이 지난 2010년, 갤러리 현대에서 박수근의 45주기전이 열렸다. 박완서는 이 전시에서 다시 한번 박수근 작품 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거의 마지막 수필,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을 썼다. 이듬해 1월, 80세의 생을 마감했으니, 박완서의 45년 작가 생활의 시작과 끝은 ‘박수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밀레와 같은 감동을 주기를 소망했던 화가 박수근은, 박완서를 통해 결국 그 꿈을 이룬 셈이다.

※ 이 글에 소개된 작품은 오는 3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전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