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최보윤이 만난 사람] “화산 부글부글 끓다가 문화적 폭발 일어난 기분… 영화·음악 이어 음식까지, 지금 미국은 K문화 전성시대”

최만섭 2021. 12. 27. 05:12

 

[최보윤이 만난 사람] “화산 부글부글 끓다가 문화적 폭발 일어난 기분… 영화·음악 이어 음식까지, 지금 미국은 K문화 전성시대”

LACMA 아트+필름 갈라 공동의장 에바 차우

입력 2021.12.27 03:00
 
 
 
 
 
에바 차우(전희경)는 “그간 조명받지 못한 국내 아티스트들도 해외에 좀 더 알리고, 해외 영향력 있는 스타들도 데려와 한국의 재능 있는 젊은 친구들과 만나는 장(場)을 만들고 싶어 미국에 이어 한국에도 터전을 잡게 됐다”고 했다. /LACMA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한 게 지금까지의 반평생이라면, 나머지 제 인생은 한국의 재능 넘치는 아티스트들과 문화적 유산을 바깥세상에 더 알리는 데 바치고 싶어요. 미국 LACMA(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이사회 멤버로 지역사회 발전에 환원했던 시간들, 또 10년째 LACMA 아트+필름 갈라(축제) 공동 의장으로 쌓아놓은 인맥과 노하우를 통해 양국의 좋은 시스템을 가져오고 소개하는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미 뉴욕타임스가 ‘LA 문화의 여왕’이라 명명한 한국계 미국인 사업가이자 유명 인사 에바 차우(Chow·한국 이름 전희경)는 수줍은 소녀가 ‘미래의 꿈’을 말하듯 달뜬 모습이었다. 최근 한국에 들어와 거처를 마련한 그녀는 “외국서 오래 살다 보면 애국자가 된다”면서 “세계적으로 정말 영향력 있는 분들에게 한국을 많이 소개시켜 드리고 싶고, 제가 정말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아요”라고 숨 돌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한국을 항상 그리워했는데, 타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모국에 대해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 저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조금씩 생기다 보니 한국을 위해 제가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LA 문화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보여주듯 에바는 할리우드와 미국 패션계의 실력자다.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그녀의 요청으로 올해로 10년째 LACMA 아트+필름 갈라의 공동 의장을 맡고 있다. 입장권은 5000달러(약 594만원)부터 10만달러인데 매년 600여 석 만석에 대기 명단까지 있다. 지난 11월 열린 이번 행사에선 갈라 수상자로 선정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필두로, 아마존 의장 제프 베이조스를 비롯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배우 베니딕트 컴버배치, 다코타 존슨, 엘 패닝, 헤일리 비버 등도 참석했다.

또 넷플릭스 흥행작 ‘오징어 게임’ 배우 이정재와 박해수, 황동혁 감독 등을 비롯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과 한인 이민 가족 사회 이야기를 담은 애플TV플러스 드라마 ‘파친코’의 주인공 이민호, 강동원, 이병헌 등도 초청됐다. 이 K스타들을 할리우드 스타들과 인사시킨 배후에 에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터닝 포인트

– 여러 매체에도 등장했듯 할리우드 유명 인사다. 왜 지금 ‘한국’이란 단어를 떠올렸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정말 근래에 와서야 ‘한국’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할리우드와 어쩌면 가장 가까운 한국인 중 한 명으로서 수십년간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고 싶어했지만 ‘기생충’만큼 강력한 작품은 처음이었다. 마치 자전거를 연습하던 어린아이가 스스로 처음 페달을 밟을 때의 느낌이랄까. 화산이 밑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문화적 폭발이 일어난 기분이었다.”

에바 차우는 16세 때인 1974년 가족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대학 시절 모델 일을 하다 할리우드 제작팀 밑바닥부터 일하게 됐고, 감독·배우들과 친분을 쌓았다. 미 LA 오티스 파슨스에 입학해 패션 공부를 다시 하며 1988년 ‘에바 전’이라는 브랜드를 선보였다. 데미 무어·니콜 키드먼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녀의 옷을 즐겨 입었다. 1992년 미국의 유명 건축가이자 레스토랑 체인 ‘미스터 차우’를 만든 마이클 차우와 결혼하면서 레스토랑 사업가이자 미술 컬렉터, 사교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지난 2011년부터 미 LACMA 아트+필름 갈라 공동 의장을 맡고 있는 에바 차우와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LACMA

할리우드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컸을 것 같다.

“미국서 수십년 사는 동안 한국은 ‘6·25전쟁’ 아니면 ‘삼성’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에게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은 한국의 문화적 역량을 일깨우는 표징이었다. 한국이라는 그림이 아예 없던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형상화시켜 준 작품이다. BTS를 통해 미국의 젊은 팬덤이 많아지고, 한국어가 알려지고, 또 할리우드 영화에 일찍 진출한 배우 이병헌,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 등 여러 스타들이 한국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K팝 콘서트를 수년간 개최하면서 한국을 알린 CJ 이미경 부회장님의 공은 익히 알려진 바고. 변화라는 건 느려 보이지만 어느 순간 폭풍 치듯 굉장히 빠르게 진행된다. 누적되고, 준비된 것들이 때를 만나면 지금의 한국이 되는 것이다.”

– 한국과 할리우드를 잇는 당신의 역할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이번 갈라 수상자로 참석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오징어게임’을 통해 본 이정재 배우를 스크린 속이 아닌 실제 모습을 보고 다가설 수 있으니, 어쩌면 저도 조금,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또 LACMA 아트+필름 갈라의 주요 목적은 사교뿐만 아니라 기부와 모금을 통한 지역사회 교육과 환원이다. 지금껏 600억원 정도 펀드를 모았고, 이를 통해 지역 간·국가 간 문화 교류에 발판이 됐다고 생각한다.”

◇무식이 차별을 만든다.

– 별다른 어려움을 거치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만 보고는 내 삶에 대해 ‘저 사람 참 운도 좋고 영화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인종차별, 나라고 안 겪었겠는가. 처음 미국에 와서 영어도 안 통하고, 모습도 다른 이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잘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물에 던져지면 수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지 않는가. 살기 위해 노력했고, 노력하니 기회가 왔다. 중간 과정 없이 결과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어떤 노력들이 있었나.

“레스토랑을 운영할 때는 ‘오래된 신발’을 신은 것처럼 편안함을 줘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스타라고 특별 대우 하지 않고,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느끼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LACMA 갈라 행사 때도 마찬가지다. 막판에 꽃잎 하나까지 점검하고, 뒷정리도 했다. 어쩌면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유난 떤다’고 말할지도 모른다.(웃음)”

– 과정의 고통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단번에 상승을 원하는 이도 많다.

“나는 노력이 제일 중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감⋅취향⋅지능⋅기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베토벤⋅피카소가 아닌 이상, 노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이다. 노력하지 않고, 어려운 과정을 모르고 그냥 결과만을 바라는 건 세상을 기만하는 일이다.”

– ‘기생충’ ‘BTS’ 등과 같은 성과 못지않게 지난해엔 아시안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STOP ASIAN HATE’ 운동이 일기도 했다.

“무식과 무지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다. 모르니까 거부감⋅무서움⋅두려움을 넘어선 혐오까지 생긴다. 그간 미국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한국을 필두로 아시아계도 많은 성취를 했지만 넘어설 벽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2007년 LACMA 이사회 멤버가 됐는데 50명 중 동양인은 아직 나 하나다.”

◇소주로 시작해 각종 문화 교류까지 한국 알림이로 평생 바치고파

그녀는 한국을 알리는 일 중 최근 ‘식문화’에 손을 댔다. 오랜 기간 레스토랑 사업을 하며 얻은 노하우로 전 세계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3년간 개발해 지난 9월 자신 한국 이름인 전희경의 이니셜을 따서 키(KHEE) 소주를 선보였다. 듣는 이에 따라 ‘열쇠’라는 영어의 키(key)라고 들리기도 하고, ‘끼’라는 의미도 담았다고 했다.

– 왜 소주였나.

“외국인들이 와인과 사케에 대해선 줄줄 외는데 한국 술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 한국의 전통 증류식 소주를 마셔보고는 ‘이거다’ 싶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우주적이라는 게 내 생활 신조다. 내가 마시고 싶은 술,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받고 싶은 꽃… 내가 대우받고 싶으면 싶을수록 상대가 무얼 좋아할지 자세를 낮춰 더욱 고민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통한다는 뜻이다.”

– 11월 LACMA 아트+필름 갈라 행사 때 첫선을 보였는데.

“당시 바텐더를 통해 들으니 배우 베니딕트 컴버배치와 크리스 에번스(캡틴 아메리카) 등 모두가 ‘만취’할 정도로 즐겼다고 했다. 병 디자인은 한국의 기와집 같은 미묘한 각도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했다. 맛은 물론이지만 우선 병부터 아름다워야 진열장에서 해외 소비자들의 눈에 띄기 때문이다.”

– (영화를) 보는 맛과 (음악) 듣는 맛에 이어 입맛까지 한국적인 ‘마법의 서클’을 이뤄내겠다고 했다.

“차별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이미 말했다. 한번 길들여지면 알고 싶고, 궁금해지면 또 다른 것이 들린다. 영화와 드라마 속 음식이 궁금해지고, 장소를 찾고 싶어 한다. 그 중독은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영화 스카페이스에서 ‘Don’t get high on your own supply(본래 목적을 잃은 채 본인이 파는 것에 빠지지 말아라)’라고 하는데 나는 술도, 음악도, 드라마도 한국의 모든 것이 좋으니 아무래도 나는 내 일에 너무 빠져든 것 같다. 하하.”

그러던 그녀가 한국에 대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고 했다. “갑질”이라고 했다. “한국에 와서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처음 들었다”며 분개했다. 그녀는 ‘오프더레코드(보도 제외 사항)’라고 말하더니 이내 번복하며 “직책이 주는 권위를 인간 관계에 주종(主從)으로 적용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이분의 친절함은 알려질 필요가 있다”면서 말을 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일하는 아주머니서부터 정말 모든 이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하며 친절하게 대하시더군요. 그게 전 가장 우아하다고 생각해요. 대통령? 직업이나 직책에선 권위가 있어야 하죠. 하지만 인간 대 인간 관계에 왜 순위가 들어가야 하죠? 그 순위를 누가 정하죠? 돈? 직책? 인격 순위는 누가 매기는 건가요.”

☞에바 차우

열두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다섯 남매가 어머니와 함께 미국 이민을 떠났다. 패션 디자이너 ‘에바 전’으로 데뷔한 뒤 동서양을 아우른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 CFDA(의상디자인협회) 회원이 됐다. 1992년 미국 사업가 마이클 차우와 결혼해 레스토랑 사업체를 성장시키며 명성을 쌓았다. 뉴욕타임스가 ‘LA 문화의 여왕’이라고 호명한 유명 인사. 칸영화제와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받은 ‘잠수종과 나비’의 영화감독 겸 화가 줄리언 슈나벨이 그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