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클래식 따라잡기] 남성 전유물 '포디엄'… 성차별 허물고 당당히 오른 그녀들

최만섭 2021. 12. 27. 05:04

 

[클래식 따라잡기] 남성 전유물 '포디엄'… 성차별 허물고 당당히 오른 그녀들

입력 : 2021.12.27 03:30

유리천장 깬 음악계 여성들

 최근엔 뛰어난 여성 지휘자가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사진은 유명 여성 지휘자인 마린 올솝이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클래식 음악계에서 지휘는 주로 남성 전유물이었죠. 여성 지휘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건 남녀 차별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과거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주로 남성이었고, 유럽 유명 음악 학교에 여성이 입학하는 일이 드물다 보니 클래식 음악계는 남성 위주로 돌아갔습니다. 지휘자가 서는 단(포디엄·podium)에 여성이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풍토가 있었고, 여성이 곡 전체를 주도하는 게 불편하다는 식으로 거부감을 나타내는 남성 단원들도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21세기 들어 뛰어난 여성 지휘자가 많이 나오면서 더 이상 지휘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따지지 않게 됐어요.

최근에는 우리나라도 여성 지휘자들의 활약이 눈부셔요. 지난달 성시연이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주목받았어요. 김은선은 201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첫 여성 상임 음악감독으로 발탁됐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을 지휘하면서 데뷔했죠.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도 지금은 노르웨이 트론헤임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지휘봉을 잡고 있어요. 우리나라 여성 지휘자 역사는 1989년 대전시향 초청 지휘를 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김경희를 시작으로 봅니다.

뉴욕 필하모닉 첫 번째 여성 지휘자

그렇지만 아직 세계 유명 교향악단에서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는 여성은 없습니다. 여성들이 오랜 기간 음악계에 만연한 차별과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셈입니다.

여성 지휘자로서 상징적인 인물은 뉴욕필하모닉 최초 '여성' 지휘자였던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입니다. 2018년 브리코를 모델로 한 영화 '더 컨덕터'가 개봉하면서 세상을 떠난 지 30년 만에 다시 화제가 됐죠.

브리코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어요. 여섯 살 때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양부모에게 입양됐죠.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재질을 보이던 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다니던 시절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조수로 일했어요. 이곳에서 피아노 연주와 지휘를 겸했죠. 1927년에는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최초로 마친 미국인이 됐어요. 마스터클래스란 유명 음악가가 다른 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학생을 일대일로 가르치는 수업을 뜻해요. 유명 지휘자이자 뛰어난 지휘 선생이었던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카를 무크에게 직접 지휘를 배우기도 했죠.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는 1930년 2월 베를린 필 지휘자로 서게 됐어요. 이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함부르크 필 등 지휘를 거쳐 1938년 7월 뉴욕 필하모닉 단에 서게 됩니다. 핀란드의 대작곡가 시벨리우스 초청을 받아 헬싱키 필하모닉을 지휘하기도 했죠. 1942년 콜로라도주 덴버에 정착한 뒤에는 자기 이름을 딴 '브리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활동했어요. 동시에 피아노와 지휘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내기도 했답니다.

1974년엔 브리코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안토니아: 여인의 초상'이 발표됐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오랜 기간 겪어 온 음악계 성차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설명했어요. 이 작품은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며 여성 지휘자로서 브리코를 재조명했어요.

흑인 여성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다

비슷한 시대 브리코처럼 성차별뿐 아니라 인종차별까지 극복해가며 성공한 여성 작곡가가 있습니다. 미국 아칸소주 출신 흑인 여성 플로렌스 프라이스(1887~1953)예요. 그는 치과의사였던 아버지와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열한 살에 자신이 작곡한 첫 작품을 발표할 정도로 음악적으로 뛰어났죠.

그는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혔어요. 흑인이라는 출생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고향을 멕시코 푸에블로로 등록하고, 멕시코인으로 신분을 위장해야 했죠. 플로렌스는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하고 졸업했어요. 1912년 결혼했지만 1931년 이혼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를 겸하며 힘겹게 생활했어요.

그러던 마침내 이름을 알릴 기회가 옵니다. 1932년 플로렌스의 교향곡 1번이 로드먼 워너메이커 콩쿠르에서 1위로 이름을 올린 거예요. 동시에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3위로 입상했죠. 이듬해 역시 흑인 여성이자 시카고 음악 협회장이었던 음악평론가 모드 로버츠 조지가 플로렌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250달러를 들여 플로렌스의 교향곡 1번을 시카고 심포니가 연주하도록 한 거예요. 플로렌스는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가 작품을 연주한 첫 번째 여성 흑인 미국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됐답니다.

그의 작품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어요. 야니크 네제 세갱의 지휘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녹음한 플로렌스 프라이스의 교향곡 1번과 3번 앨범은 내년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에서 최고의 오케스트라 연주 음반 후보로 올랐습니다. 흑인 특유 분위기가 담긴 멜로디와 유럽 낭만파 교향곡 특징을 동시에 담고 있는 그의 작풍을 화려하면서도 명쾌하게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에요. 외롭고 힘들지만 차별과 편견에 맞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간 여성 음악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싶습니다.
 지난달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주목받은 우리나라 여성 지휘자 성시연. /김지호 기자
 뉴욕 필하모닉 최초 여성 지휘자인 안토니아 브리코. /위키피디아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