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시론] 김정은의 허망한 칼춤

최만섭 2021. 8. 20. 04:59

[시론] 김정은의 허망한 칼춤

北 협상술은 ‘거부’와 ‘위협’ 우리는 협상 전부터 양보하고
시한에 쫓겨 타협하기 일쑤, 한미훈련 취소·미군 철수 요구…
북, 문 정부 말기에 수법 되풀이… 유엔 제재 풀기 더 어려워질 뿐

이용준·전 외교부 북핵대사

입력 2021.08.20 03:20

 

 

 

 

 

최근 북한의 남북 통신선 복원, 한미 연합 훈련 취소 요구, 불취소 비난, 통신선 재차단으로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대남 소동을 접하면서 북한의 상투적 대외 협상 전략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스탈린 치하 구소련에서 전수받은 북한의 협상술은 완고하고 집요하기로 악명 높다. 과거 북한과 협상에 나섰던 한국과 미국 협상팀 중 북한의 험악한 협상 행태에 굴하지 않고 기본 자세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경우는 별로 없다. 대다수 남북 회담이 그랬고, 1990년대 제네바 미북 핵 협상과 한반도 평화 체제에 관한 4자 회담이 그랬고, 북핵 6자 회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협상술의 비밀이 이젠 대부분 드러나 약효가 떨어졌지만, 지금도 그 술수에 농락당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미연합훈련 사전훈련 개시일인 지난 1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과 남조선군은 끝끝내 정세 불안정을 더욱 촉진시키는 합동군사연습을 개시했다"며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이 가장 애용하는 필승 협상 수법은 ‘거부’와 ‘위협’이다. 북한은 예비 협상 단계부터 온갖 ‘선결 조건’을 내세워 협상 개시를 거부한다. 장기간 신경전에 지친 상대방은 ‘단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북한이 요구하는 대규모 식량 원조나 한미 연합 훈련 잠정 중단, 일부 핵심 쟁점의 사전 양보 등 큰 대가를 지불하곤 한다. 1990년대 이래 한국의 대북 식량 지원과 한미 연합 훈련 취소 사례 중 상당수가 이에 해당한다. 협상이 어렵사리 시작된 후에도 북한은 거부 일변도의 경직된 협상술을 집요하게 고수한다. 이 때문에 협상 시한에 쫓기는 상대방은 승산 없는 입씨름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거부의 협상술과 더불어 위협의 협상술을 병행한다. 회담장에서 북한은 시도 때도 없이 남북 관계 단절, 군사적 응징, 전면전 불사 등 고강도 협박을 동원한다. 1993년 판문점 남북 핵 협상 시 북한 대표는 우리 대표에게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위협했다. 격노한 김영삼 대통령이 그 장면을 언론에 공개해 세상에 알려졌으나, 이는 단지 빙산의 작은 일각일 뿐이었다. 이런 부류의 ‘협상용 위협’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남북 관계를 절대 가치로 신봉하고 북한의 비난 한마디에 외교 안보 장관들 목이 줄줄이 날아가는 나라가 그 앞에서 의연할 수는 없다.

북한이 보유한 필승 협상술이 하나 더 있다. 협상 카드가 거의 없는 북한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끊임없이 새로운 협상 카드를 창출해 내는 능력이다. 그 실제 사례는 회담 일자 합의 거부, 전화 수신 거부, 연락 사무소 폐쇄, 개성공단 폐쇄, 영변 핵 시설 보수 작업 등 많고도 많다. 남북 통신선을 열었다 닫기를 6차례나 반복하면서 재탕·삼탕 협상 카드로 이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녹슬어 고철이 된 영변 핵 시설을 이따금 되살려 재가동하는 것도 대미 협상에서 카드로 써먹으려는 꼼수다.

 

최근 남북 통신선이 뜬금없이 재개통되더니 이를 핑계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한미 연합 군사훈련 취소를 요구하고, 곧이어 한국 정부의 ‘배신적 처사’를 비난하면서 ‘안보 위기’ 조성을 위협했다. 경제난, 코로나, 자연재해로 삼중 위기에 처한 북한이 문재인 정권 말기에 남북 관계 복원을 미끼로 한밑천 잡고자 벌이는 이 대남 공세에는 북한의 상투적 협상 수법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배신자’로 지목된 문재인 정부가 동요하고 국내 종북 세력의 집단적 동조 움직임까지 가세하자, 이에 고무된 북한은 주한 미군 철수까지 주장하며 판돈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협박으로 연합 훈련 폐지와 주한 미군 철수가 실현될 수는 없다는 점을 북한 당국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거듭되는 위협에도, 북한이 내년 한국 대선을 앞두고 한국이나 미국을 겨냥한 고강도 도발을 강행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필연적으로 한국 보수 진영의 입지를 강화하고 북한의 유일한 희망인 유엔 제재 해제를 더 요원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를 향한 북한의 허망한 칼춤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는 그간 북한에 온갖 장밋빛 약속을 남발해 온 문 정부가 대북 경제 지원과 제재 해제를 위해 마지막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북한의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유엔 제재와 미국 세컨더리 보이콧의 견고한 장벽을 넘어 북한에 통 큰 경제 지원을 제공할 합법적 샛길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지금 남북한 양측 지도부에 어려운 정치적 선택을 압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