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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군사 3권 장악한 서열 1위 빅브라더의 죽음

최만섭 2021. 8. 14. 11:50

정치·행정·군사 3권 장악한 서열 1위 빅브라더의 죽음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08.14 09:07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 사망 후 열흘 간 중국은 10일 간의 국장(國葬)에 들어갔다. 9월 18일엔 백만 군중이 추도식에 참가했다. 10월 8일, 중공 중앙은 마오쩌둥 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70회>

하늘 아래 땅이 있는 형상의 “천지비(天地否)”괘는 <<주역(周易)>> 64괘(掛) 중 가장 불길한 점사(占辭)다. 반대로 땅 아래 하늘이 있는 “지천태(地天泰)”괘는 가장 융성하고 상서로운 앞날을 예고한다. 표면상 상식에 반하지만, 모든 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지비괘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대혼란이 숨어 있다. 지천태괘를 보면, 머잖아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리(順理)의 변화가 읽힌다.

문혁 10년의 대동란(大動亂) 동안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져 치솟았다. 이른바 천지번복(天地飜覆)의 카오스가 펼쳐졌다. 문혁의 참극이 막바지에 달할 땐, 하늘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땅이 맨 위까지 치솟았다. 어둠의 긴 터널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인민의 대다수는 그 거대한 변화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진정 동 트기 직전이 더 어둡고 폭풍의 전야가 더 고요한 법.

심근경색으로 두 번째 쓰러진 마오,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절명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한 달이 채 못 돼 4인방이 전격 체포되었다. 곧이어 문혁 “10년의 대동란(大動亂)”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이후 2년의 권력투쟁을 거쳐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개혁개방”의 깃발을 들고 지치고 굶주렸던 인구 8억의 광활한 대륙에 제2의 혁명을 일으켰다. 실로 인류사에 흔치 않은 “지천태”의 격변(激變)이었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53초, 베이징에서 불과 120킬로미터 떨어진 중국 허베이성 탕산(唐山)에 강도 7.6의 대지진이 몰아쳤다. 불과 몇 분 내에 탕산의 대부분 건물들이 무너지고, 대부분의 철도와 고속도로가 끊기고, 수도관이 터지고, 통신시설이 모두 두절됐다. 중국사에 기록된 가장 참혹한 지진이었다. 정부 공식 통계만으로도 최소 24만 2천여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16만 4천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물론 비공식 통계의 수치는 그 몇 배를 상회한다.

탕산 대지진 발발 32일 전, 6월 26일 마오쩌둥은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중난하이 실내수영장 옆방에 마오의 병상이 마련됐다. 16명의 의사와 24명의 간호사로 구성된 전담 의료팀이 지근거리서 밤낮으로 마오를 돌봤다.

탕산(唐山) 대지진, 1976년 7월 28일/ 공공부문

마오의 병상 주변엔 의료팀 외에도 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화궈펑(華國鋒, 1921-2008)과 왕홍원(王洪文, 1935-1992), 중공중앙위 정치국 위원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와 중앙 경위국(警衛局) 국장 왕동싱(汪東興, 1916-2015)이 머물며 불철주야 위급한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대지진 발발 당시 중난하이 마오의 병실도 무사할 순 없었다. 지진파가 땅이 뒤흔들며 지나자 건물 벽이 심하게 흔들리며 수영장의 물이 격하게 출렁였다. 공포에 질린 의료팀과 중앙위원들은 황급히 마오의 병상을 중난하이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202” 건물로 옮겼다. 탕산 대지진 발발 6주 후, 1976년 9월 9일 0시 10분께 마오쩌둥은 숨을 거뒀다.

27년간 중국공산당 서열 제1위 최고영도자로 군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부터 27년 동안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서열 제1위의 최고영도자로 군림해왔다. 그는 정치·행정·군사 3권을 모두 장악하고 국가의 모든 대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교통, 통신, 정보, 군사 기술 등 현대국가의 기반 위에서 그는 전통 시대 어느 황제도 갖지 못했던 막강한 “권력의 인프라”(infrastructure of power)를 확보했다.

마오는 또한 조직적인 선전·선동의 기술을 발휘해 매스미디어를 전면 장악하고 대중의 의식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문혁 시기 그는 단순한 정치지도자를 넘어 전 인민의 눈동자에 날마다 강림하는 인격신으로 군림했다. 그는 천신지기(天神地祇, 하늘의 신과 땅의 신)를 대신해 중국 인민의 심성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마오주석 만세!”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했고, 날마다 그의 어록을 졸졸 암송했다. 요컨대 마오쩌둥은 전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 행정대권, 군사력, 문화권력, 이념권력까지 장악하고 행사했던 ‘전체주의 정권’(totalitarian regime)의 ‘전제군주’(despot)였다.

마오가 사망한 1976년 9월 9일 중국의 언론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어떤 기사도 나지 않았다. 9월 9일 오후 4시에야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9월 10일 전 중국의 모든 조간 1면엔 최고영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특대급 부고(訃告)가 실렸다. 부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마오는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조자이며 영명한 영수”였다. 한 달이 넘도록 날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의 사상을 학습하고, 유지를 계승하자는 취지의 기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북한 김일성 조전...인민일보, 한 달 넘게 애도·칭송·결의

몇 가지 인상적인 기사만 추려보면, 9월 11일 인민일보 1면 오른편 상단엔 큼직하게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이 발신한 조전(弔電)의 원문이 게재됐다. 9월 14일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인민의 마음속에 마오쩌둥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기사가 장식됐다. 9월 19일엔 수도의 1백만 군중이 모여서 추도대화를 거행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9월 21일엔 “8억 인민의 서언(誓言)”이 실렸다. 10월 9일엔 중궁중앙이 “주석 기념관”의 건립과 <<마오쩌둥 선집>> 및 <<마오쩌둥 전집>>의 출판을 결정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10월 10일엔 다시금 “마오주석의 혁명노선을 계승하자”는 “억만 인민의 공동 염원”이 실렸다.

1976년 10월 22일, 인민일보 제1면. 4인방 반혁명집단의 중국공산당 찬탈 및 국가권력 탈취 음모를 분쇄한 화궈펑의 영웅적 업적을 기리고 중공중앙 주석 및 중앙군사위 주석 취임을 경국하는 군중 대회를 보도했다./ 인민일보

한 달 넘게 지루하게 이어진 애도, 칭송, 결의의 릴레이였다. 10월 13일에야 총리 화궈펑의 사진이 처음으로 <<인민일보>>제1면 중앙을 장식됐다. 뭔가 중앙정치의 큰 변화를 암시하는 큰 사건일 수 있었지만, 아직 물밑의 정치투쟁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곧이어 화궈펑은 느닷없이 5.4운동의 아이콘 루쉰(魯迅)의 정신을 학습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민의 애국심을 고취해 마오쩌둥의 부재에 따른 이념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했다.

급기야 10월 22일 놀랍게도 4인방의 체포가 대서특필됐다. 급격한 사태의 반전이었다. 마오쩌둥 사후 최소 한 달간 중앙 언론은 변함없이 4인방의 선전·선동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었다. 4인방이 장악했던 언론에 몰아닥친 변화의 쓰나미였다. 그날 인민일보 제 1면엔 “4인방 반혁명집단의 이른바 ‘찬당탈권(簒黨奪權, 당을 찬탈해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의 분쇄를 열렬히 경축하고, 화궈펑 동지께서 중공 중앙 주석, 중앙군위 주석에 취임하심을 경축하는 수도 1백 50만 군민의 행진”이 대서특필됐다. 이례적으로 헤드라인은 붉은 글씨로 인쇄됐다.

 

그때서야 중국의 평범한 인민은 화궈펑이 정치투쟁을 통해 4인방을 제압하고 중앙권력을 온전히 장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중공 기관지들은 4인방에 대해선 일체 함구하고 있었다. 사후 밝혀지지만, 4인방은 이미 10월 6일 이미 긴급 체포된 후, 억류돼 있었다.

 

52세 연하 비서 장위펑 “주석님 가십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하죠?”

마오의 사망 진단을 내렸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의 기록에 따르면······. 마오의 호흡이 멈추자 최후 14년간 그림자처럼 가까이서 그를 따라니며 모셨던 52세 연하의 비서 장위펑(張玉鳳, 1945- )은 울부짖었다. “주석님, 가십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하죠?”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1914-1991)이 장위펑의 손을 잡고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이후엔 내가 너를 쓸게!”라 말했다. 울음을 멈춘 장위펑은 웃음을 지으며 “장칭 동지, 고맙습니다!” 했다.

장위펑은 왜 울음을 터뜨렸을까? 사라진 주군을 향한 충성심이었을까?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포감이었을까? 장칭은 왜 시녀처럼 애첩처럼 14년 간 자신의 남편을 독점했던 어린 장위펑을 위로하며 흔쾌히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을까? 절대 권력자가 사라진 후 더 큰 권력을 갈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정치투쟁의 피비린내를 맡았기 때문일까?

국무원의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후, 4인방은 전국적으로 거세지는 추모 열기를 반혁명 세력의 준동이라 여겨 억압했다. 1976년 4월 4일-5일 베이징의 톈안먼에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4인방을 규탄했을 때, 4인방은 마오쩌둥을 설득해서 전격적으로 덩샤오핑을 몰아낼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그러나 게릴라 전사의 예리한 정치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4인방이 국가를 운영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76년 4월 7일 마오는 덩샤오핑을 파면하는 동시 화궈펑을 중공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이자 국무원 총리에 임명했다. 마오가 죽고 나면, 당연히 제1부주석이 주석의 지위를 승계하게 될 터였다. 화궈펑은 또 행정부를 도맡았던 저우언라이의 직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로써 화궈펑은 명실상부 마오의 공식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다. 화궈펑의 급부상은 4인방을 제압하는 마오 최후의 한 수였다.

수령이 떠난 세상에서 수령의 권위를 빌어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수령의 수족들이 다 모여 봐야 수령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인방은 오로지 마오의 지시에 따라, 마오의 심기를 살피며, 문혁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오쩌둥 사상의 깃발을 높이 들고 “진격 앞으로!”를 외쳐댔던 마오의 선전대원일 뿐이었다. 4인방에게 마오의 죽음은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력 기반의 붕괴를 의미했다.

마오의 만년 마지막 14년간 지근거리에서 비서로 활약했던 장위펑의 모습/ 공공부문

 

화궈펑, 맹수 생포하는 사냥꾼처럼 4인방에 올가미 걸어 제압

중공 중앙의 권력은 마오의 간택을 받은 화궈펑에 기울었다. 마오가 죽기 전 화궈펑에게 4인방 집단을 몰아내라는 유촉(遺囑)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마오의 사후, 화궈펑은 야생의 맹수를 생포하는 사냥꾼처럼 치밀하게 덫을 치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4인방의 모가지에 올가미를 걸었다. 문혁 “10년의 대동란”에 종지부를 찍는 정치드라마였다. 마오가 죽고 나서 채 한 달도 못 지나 1976년 10월 6일 소위 4인방과 베이징 대학과 언론사에 대거 포진해 있던 4인방의 선전대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화궈펑이 4인방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예젠잉(葉劍英, 1897-1986), 천시롄(陳錫聯, 1915-1999) 등 군부의 실력자들이 의기투합해 화궈펑의 편에 섰고, 또한 중공중앙 판공청(辦公廳) 주임으로서 마오쩌둥의 신변안전을 도맡았던 왕동싱이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 달간 물밑 작업을 통해 의기를 투합한 군부와 경호대는 10월 6일 오후 3시 급기야 체포 작전을 수행했다. 치밀한 계획 아래 왕동싱은 <<마오쩌둥 선집>> 편찬 건으로 중난하이의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정치국 상임위원들을 불러 모았다. 저녁 8시 경, 미리 짜놓은 체포 시나리오에 따라 4인방이 차례로 붙잡혀 갔다.

체포조가 4인방을 덮칠 때마다 화궈펑이 그 앞에서 체포 영장을 읽었다. 상하이 노동자의 심벌 왕홍원(王洪文, 1935-1992)은 몸싸움을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이렇게 빨리 잡힐 줄 몰랐다!”고 중얼거리며 끌려갔다. 장춘차오는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야오원위안도 체포의 순간 “마오쩌둥 선집 제5권 출판 관련 토론을 하러 왔다! 어찌 감히!”라고 소리쳤다. 장칭 체포 작전엔 중공중앙 경위단(警衛團) 8341부대가 투입됐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장칭은 방안에 놓인 개인용 비밀금고의 열쇠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 후 그 위에 “화궈펑 주석이 열어볼 것!”이라 썼다 한다.

1981년 4인방 반혁명세력 재판. 왼쪽부터 장춘차오, 왕홍원, 야오원위안, 장칭/ 공공부문

마오쩌둥 생전 호가호위하며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이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속수무책 무력하게 죄인의 멍에를 써야 했나? 군부의 핵심세력과 중공중앙 경위단은 4인방 대신 화궈펑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화궈펑은 왜 4인방을 제거하려 했을까? 군부는 또 왜 그런 화궈펑의 계획에 동조했을까? 어쩌면 이유는 가장 단순한 데 있었다. 바로 1976년 4월 4-5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 집결해 4인방의 죄악을 규탄했던 구름떼 같은 군중의 힘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광장을 가득 채웠던 중국의 “인민 권력”(people power)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끝>

*2020년 4월 18일부터 시작한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는 이번 주 7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을이 오면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976- 현재)’을 이어가겠습니다. 독자님들의 성원과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