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대본이 성경”... 배고파 시작한 연기, 74세에 월드스타로
[윤여정 오스카 수상]
‘도전의 아이콘’ 74세 윤여정, 인터뷰 통해본 연기인생
입력 2021.04.26 21:00 | 수정 2021.04.26 21:00
26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시상식후 프레스 룸에서 트로피를 들고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어요. 나는 개가 아니니까(I didn’t smell him. I’m not a dog).”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74). 26일(한국 시각)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윤여정 어록’은 계속됐다. 이날 윤여정은 시상식에 이어 미 현지 언론들과의 무대 뒤(백스테이지) 인터뷰, 곧이어 LA 총영사관의 한국 특파원단 간담회까지 쉴 새 없이 강행군을 소화했다.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촌철살인의 직설법으로 응대하는 윤여정 특유의 화법은 아카데미와 할리우드에서도 여전했다.
감격 - 윤여정이 26일(한국 시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기뻐하고 있다. 이날 그는 유창한 영어 수상 소감으로 전 세계 영화계와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로이터 연합뉴스
시상식 직후 인터뷰에서 외신 기자의 돌발 질문이 나왔다. 여우조연상을 시상한 인기 배우 브래드 피트(58)에게서 ‘어떤 냄새가 났느냐’라는 물음이었다. 다소 짓궂고 무례하게 들릴 법한 질문이었지만, 곧바로 윤여정은 “나는 개가 아니다”라는 답변으로 응수했다. 이어 피트와 영화 촬영을 할 계획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윤여정은 “내 영어와 나이를 감안하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I don’t dream)”라고 답변했다.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를 제작한 영화사 플랜 B의 설립자다.
그는 최근 아시아 영화의 약진과 할리우드의 다양성 확대를 무지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무지개에도 일곱 가지 색깔이 있다. 남녀로 구분하고 백인과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동성애자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면서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상식 직후 LA 총영사관에서는 한국 특파원단과의 간담회가 열렸다. 윤여정은 이 자리에서 화이트와인을 홀짝이면서 여유 있게 질문에 답했다. 취재진이 여느 간담회처럼 손을 들고 차례로 질문하자 윤여정은 “손들 것 없어요. 내가 대통령도 아닌데 손을 들어요. 아무렇게나 빨리 말하세요”라며 거침없는 모습을 보였다.
반세기 넘는 연기 인생의 원동력에 대해 그는 ‘열등 의식’이라고 답했다. 윤여정은 “정말 먹고살려고 했기 때문에, 저한테는 대본이 성경 같았다”고 말했다. 오스카 수상 직전의 심적 부담에 대해서도 “태어나서 처음 받는 스트레스였다”고 고백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대표팀,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의 마음도 이해할 정도였다고 했다. 윤여정은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원을 너무 많이 하니까 힘들었다”면서 “너무 힘들어서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고 말했다. 작품 선택 기준에 대한 질문에도 ‘윤여정 어록’은 이어졌다. “안목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안목을 믿는다는 건 계산이 깔린 것이고 (나는) 그 대본을 전해주는 아이의 진심을 믿었죠.”
영화 데뷔 50주년, 배우 윤여정
아카데미 연기상은 지난 100년간 한국 배우들이 꿈꾸지 못했던 분야다. 하지만 윤여정은 “오스카상을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솔직 담백하게 말했다. ‘아카데미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라는 질문에도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최고(最高)의 순간은 없을 것이고 그런 말도 싫다. 최고나 1등 같은 말을 하지 말고 우리 다 같이 ‘최중(最中)’만 하고 동등하게 살면 안 될까.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지 않으냐.”
대신 ‘평생 배우’에 대한 욕심은 가감 없이 드러냈다. 윤여정은 “늙어서 대사를 외우기가 굉장히 힘들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싫으니까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근 ‘윤며들다’(윤여정에게 스며들다라는 의미)라는 신조어까지 유행할 정도로 한국 젊은 세대는 솔직 담백한 그의 모습에 열광하고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보여준 그의 모습을 보면, 전 세계로 ‘윤며들다’ 현상이 퍼져나갈 것 같았다.
김성현 기자
양지호 기자
사회부, 국제부, 문화부, 사회정책부를 거쳐 다시 문화부에 왔습니다. 출판, 방송, 미디어를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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