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193] 헤밍웨이와 정주영의 시간
입력 2021.03.27 03:00 | 수정 2021.03.27 00:00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고 정주영 회장이 일곱 시 조찬 모임에서 만난 사람에게 건넨 말이었다. “저는 이게 세 번째 식사입니다.” 일어나기도 힘든 그 시간에 이미 세 번의 식사를 마친 사람의 삶이 나로선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오래전 ‘일곱 시 조찬 모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긴 제목의 소설을 썼지만, 나는 아침 일곱 시에 잠들 수 있을지언정,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올빼미형 인간으로, 밤새 대단한 글을 쓴 것 같았는데 대낮에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던 때였다.
동생에게 흥미로운 얘길 들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증권회사 상무, 특수교육 교사, 고3 수험생을 둔 두 아이의 엄마 등 직업이 다양한 고등학교 동창들이 두 달에 한 번 꾸준히 만나는 비결이 있다는 것이다. 동생은 10년째 주말 아침 6시 30분에 친구들과 조식을 먹는다고 했다. “주말 오전은 거리가 텅 비어서 3~4시간 떠들고 집으로 가도 길이 안 막혀.”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유명한 CEO 얘기가 아니라, 친구 같은 동생의 얘기라 맘에 더 와 닿았다.
‘아하! 세상을 바꾸는 통찰의 순간들’이란 책에는 헤밍웨이의 독특한 작업 방식이 나온다. 헤밍웨이가 하루에 쓰는 글은 약 500단어로, 10분이면 타자로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꼬박 6시간을 작업했다. 나머지 5시간 50분은 쉬지 않고 단어와 문장을 쓰고 지웠다. 쿠바의 아바나에서 7년간 집필했던 그는 술과 낚시를 즐겼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작가였다. 낚시 전날에, 그는 글을 딱 두 배 더 썼다. 취미로 하루를 즐기기 위해선 늘 평소 두 배 분량의 노동이 앞섰다.
현대인들처럼 나 역시 오랜 시간 하고 싶은 게 많지만 바빠서 할 수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삶을 충실히 사는 많은 사람의 지혜 속의 시간은 생기는 게 아니라, 끝내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는 비밀의 열쇠가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바쁨’ 속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시간의 진짜 주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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