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공자가 말했다… “나의 답은 그 가운데 있다”고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논어 ‘자로’의 절묘한 수사…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03.27 03:00 | 수정 2021.03.27 03:00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동네에 곧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비가 양을 훔치면, 아들은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고 증언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네 곧은 이는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겸재 정선이 그린 '행단고슬(杏壇敲瑟)'.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왜관수도원 소장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저 대화는 논어 내용 중에서 가장 크게 호오(好惡)가 갈리는 부분이다. 부모와 자식 간 효도가 더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 문장을 보고 환호한다. 공자와 같은 성인도 사회적 공정성보다 가족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 반면, 공자의 저런 태도야말로 이 동양 사회를 부패로 얼룩지게 만들었다고 펄펄 뛰는 사람들도 있다. 뭐든 법대로 처리해야지 어떻게 가족이라고 숨겨줄 수 있어!
그러나 나처럼 언뜻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삶의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끙. 사회가 부패하지 않으려면 법대로 해야겠지. 그런데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해도 될까. 그러고 나서도 가족이 화목하게 유지될까. 끙. 가족의 화목이 중요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졸업장을 위조해주는 것까지 묵과할 수는 없지. 학점이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고 자식이 학교에 불을 지르러 가면,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해야 할 거야.
이런 고민을 나만 한 것은 아니다. 후대의 논어 주석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논어에 등장하는 저 아버지의 도둑질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 따져보려 들었다. 아버지가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가서 양을 훔친 경우를 공자가 말한 건 아니지 않겠는가. 양이 길을 잃어 아버지 집까지 들어오자, 다만 돌려주지 않은 상황을 말한 게 아니겠는가, 등등.
엄혹한 법 집행으로 유명한 진(秦)나라가 망한 이후,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대체로 친족 간에 범죄를 숨겨준 일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다. 이른바 용은제(容隱制)가 정착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예외는 있다. 친족이라고 해서 무작정 다 봐줄 수는 없다. 반역죄 같은 것은 친족이라 해도 고발의 의무가 있었다.
섭공과 공자 중에 누가 더 사리에 맞는 말을 하고 있는지 판정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법기관이 사회생활의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크고 어려운 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섭공은 국가기관이 사람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려면 국가 공무원 수가 늘어야 하고, 늘어난 공무원 수를 감당하려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공자는 국가가 친족 내 여러 사안까지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에, 공무원 수를 늘리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세금을 많이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대신 사법기관이 처리할 수도 있었던 많은 분쟁을 친족 구성원들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
이 같은 국가와 사회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고, 그만큼 결론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내가 논어의 저 문장에서 보다 확신을 갖고 좋아하는 것은 섭공의 견해도 아니고 공자의 견해도 아니고,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는 수사법이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줍니다. 바로 그것이 곧은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지 않고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소한 표현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그렇지 않다. 사소하다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공자는 논어에서 저 표현을 거듭 사용한다.
공자는 말한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봉록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言寡尤,行寡悔,祿在其中矣).”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봉록을 얻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봉록이 꼭 생긴다는 보장은 없기에 일부러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공자는 또 말한다.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로 삼아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로 삼으면 즐겁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가난하다고 즐거운 것은 아니기에 일부러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공부하면, 봉록이 그 안에 있다. 군자는 도를 근심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學也,祿在其中矣.君子憂道不憂貧).” “공부하면 봉록이 생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공부의 목적이 봉록은 아니기에 일부러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 수사법의 응용 여지는 무한하다. 어떤 학생이 진학 상담을 하러 연구실 문을 두드린 경우를 상상해보자. “선생님, 저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자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런데 학자로 취직할 수 있을까요?”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취직이 되겠어요? 굶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다. 입에 담기 가혹한 말일 뿐 아니라, 나중에 용케 취직이라도 하게 되면, 거짓 예언을 한 셈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취직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다. 그건 “아이를 낳아 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큰다”처럼 무책임한 말이다. 누군가 인생을 갈아 넣어서 아이를 키우는 법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공자의 본을 받아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 “공부 열심히 하다 보면, 직장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나는 그 학생의 인생에 대해 단정적인 예측을 피한 것이다. 그리고 취직의 필요성은 긍정하되, 취직이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라는 점 역시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학문의 길이란 장기 레이스이기에, 취직에 관련된 불안을 견디는 일마저 포함한다는 메시지도 전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이란 계획하거나 예측한 대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며, 살아나간다는 것은 삶의 우연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 인생관을 넌지시 담은 것이다. 그 점까지 읽어내는 학생이라면 전도유망한 미래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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