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 -2016년 1월 6일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7] 지상낙원 섬을 불지옥 만든 핵실험… 21세기엔 북한만 자행

최만섭 2021. 3. 23. 05:20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7] 지상낙원 섬을 불지옥 만든 핵실험… 21세기엔 북한만 자행

강대국의 핵실험 그 끔찍한 후유증

주경철 교수

입력 2021.03.23 03:00 | 수정 2021.03.23 03:00

 

 

 

 

 

1954년 3월 1일, 태평양 중서부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環礁) 인근 주민들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뜬 것을 보고 놀랐다.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핵실험으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천 배 규모인 15메가톤(TNT 1500만톤의 폭발력)의 수소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날 실험은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 원래 과학자들이 기대했던 최대 산출력은 6.5메가톤이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추가적인 핵반응으로 두 배 이상으로 커진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환경 재앙이 발생했다. 이 지역 환초 중 하나는 완전히 증발해 버렸고, 버섯구름은 160km 이상 날아가 바다로 떨어졌다. 수백만 톤의 오염된 모래와 산호 부스러기가 주변 섬에 5cm 두께로 쌓였다. 미군 당국은 핵실험 사흘 후에야 주민들을 소개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주변 해역에 있던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선원 23명 또한 ‘죽음의 재’(낙진)를 뒤집어쓰는 큰 피해를 보았다. 캐슬 브라보는 미국이 1946~1958년에 비키니 환초에서 수행한 대규모 핵실험 67건 중 한 건에 불과하다.

1946년 태평양 비키니 환초 美핵실험 - 1946년 7월 25일 태평양 중서부 미크로네시아의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이 진행한 핵실험으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고 버섯구름이 퍼져나가는 모습. 미군이 현장에서 촬영한 흑백 원본에 바다와 나무 등의 색을 입힌 사진이다. 해저 27m에서 핵탄두를 폭발시켜,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바닷물이 퍼져나가며 광범위하고 심각한 오염을 일으켰다. 미군은 이해 7월 1일과 25일 두 차례 진행한 이때의 핵실험을 작전명‘크로스로드’라 불렀다. 직전 해인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뒤 진행한 첫 핵실험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후 1958년까지 비키니 환초에서 대규모 핵실험을 67차례 진행했다. /위키피디아

 

태평양의 지상낙원이 핵실험 무대가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4년 일본이 철수한 이후 마셜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이후 핵실험 장소를 찾던 미국은 이 지역의 비키니 환초가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군 당국은 주민들에게 ‘인류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모든 세계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하는 일이니 ‘일시적으로’ 자리를 비워달라고 말했다. 쫓겨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여러 섬을 전전하다가 1974년 고향에 돌아갔지만, 이미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생선·게·코코넛 등을 먹은 후 심각한 증상에 시달렸다. 이 사람들은 1978년 다시 주변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1958년 미국이 마셜제도에서 핵실험을 중단했으나, 곧 영국과 프랑스가 태평양 지역에 뛰어들었다. 샤를 드골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에 진력하던 프랑스는 1960년 당시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막 지대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런데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자 새 핵실험 장소를 찾다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모루로아(Moruroa) 환초와 팡가타우파(Fangataufa) 환초 지대에서 핵실험을 계속했다. 특히 40번 이상 대기권 핵실험을 한 결과, 방사성 물질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 시대는 태평양 지역에 독립 국가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공식적인 반대가 쉽지 않았다. 1970년에 가서야 피지와 통가가 이의를 제기했고, 남태평양 포럼(South Pacific Forum, 남태평양 국가들의 정상회의)이 프랑스 정부에 핵실험 중단을 요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가두시위가 빈발하고, 노동조합은 프랑스 선박의 화물 하역을 거부했다.

2018년 북한 풍계리 2018년 5월 24일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위한 폭파 작업 당시 갱도 앞을 지키고 있는 북한 군인. 북한은 21세기의 유일한 핵실험 국가다. /사진공동취재단

 

1975년, 뉴질랜드는 ‘핵 없는 남태평양 구역(South Pacific Nuclear Free Zone)’ 설치를 제안했다. 이후 태평양 도서 국가 주민들의 반전·반핵 운동이 강화되었다. 1983년 바누아투의 포트빌라(Port Vila) 회의에서 “태평양 주민들에 대한 억압, 착취, 예속을 즉각 중단하라”는 인민헌장이 발표되었다. 마셜제도에서는 눈과 팔, 머리가 없는 소위 ‘해파리 아기(Jellyfish Babies)’ 문제를 제기하여 세계 여성 운동 조직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그럼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핵실험을 고집하던 프랑스 정부가 결정적으로 흔들린 계기는 1985년 그린피스 워리어(Greenpeace Warrior)호 침몰 사건이다. 반핵 활동가들이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항구에서 선박들을 동원하여 프랑스의 핵실험 반대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7월 10일, 프랑스 정보부 요원 두 명이 그린피스 워리어호에 선체 부착 폭탄 두 개를 설치하여 배를 파손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진사 페르난두 페레이라가 사망했다.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곧 위조 여권을 지닌 프랑스 정보부원이 체포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핵실험을 지속하려 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 포도주를 길거리에 쏟아버리는 식의 항의가 거세게 이어졌다. 마침내 그해 8월 남태평양비핵지대조약(South Pacific Nuclear Free Zone Treaty)이 제정되었다(일본의 방사성 핵폐기물 해양 투하 계획도 조약 제정을 부추긴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는 1996년까지 이 조약의 모든 의정서에 서명했다.

 

강대국들의 핵실험은 태평양 지역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을까?

1971년 모로루아 환초 佛핵실험 - 1971년 폴리네시아 모루로아 환초에서 벌인 프랑스의 핵실험으로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는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최근 프랑스 탐사 보도 매체 디스클로즈는 “프랑스 정부가 폴리네시아에서 1966년부터 1996년까지 핵실험을 193차례 하면서 환경·보건에 끼친 피해를 축소·은폐했다”고 보도했다. 2013년에 기밀 해제된 약 2000페이지의 프랑스 국방부 문건에 대해 영국의 자료 해석 기업과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진의 협력 연구로 2년 동안 분석한 결과다. 특히 오염 가능성이 가장 큰 6번의 핵실험 과정에서 해당 지역 주민들이 입은 신체적 피해를 재조사한 결과, 2006년 프랑스 핵에너지위원회(CEA)의 조사 결과보다 최소 2배, 많게는 10배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 예컨대 1966년 모루로아에서 시행한 암호명 알데바랑(Aldébaran) 대기권 핵실험 피해 조사를 할 때 CEA는 주민들이 강물만 마시는 것으로 가정하고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빗물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1974년 시행된 암호명 ‘켄타우로스(Centaure)’ 핵실험 사례를 재조사한 결과는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이 11만명으로, 다시 말해 거의 모든 주민이 해당하고, 그 가운데 핵실험에 따른 보상이 이뤄지는 국제적 기준보다 5배 이상 많은 피폭량이 확인된 주민만 1만1000명에 달한다는 점을 밝혔다. 당시 주민들에게 사전 예고를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핵실험을 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그동안 프랑스 정부가 피해 보상에 나서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6년 방사성 낙진으로 인한 폴리네시아 주민들의 피해를 인정했고, 2009년부터 보상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실제 보상받은 사람은 63명에 불과하다. 지금도 폴리네시아 인근 바다에는 거대한 양의 핵폐기물이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더 이상의 핵 위험을 줄이려 1996년 UN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Nuclear Test Ban Treaty, CTBT)을 제정했다. 미국·중국·러시아·이스라엘·이집트는 이 조약에 서명했으나 비준을 마치지 못했고, 북한의 경우는 서명조차 하지 않아 국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 북한은 21세기의 유일한 핵실험 국가다. 가공할 위력의 핵실험이 어느 정도의 환경 재앙을 가져오고 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우리 자신도 여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는 점이다.

 

<차르 봄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폭탄은 1961년 10월 31일에 구소련이 북극해의 노바야제믈랴 제도 상공에서 터뜨린 차르 봄바(Tsar Bomba, ‘황제 폭탄’, 공식 이름은 AN602)로 알려져 있다. 60년 만에 비밀 해제된 관련 자료 중 최근 핵실험 영상이 일반에 공개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 수소폭탄의 산출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 원자탄의 3300배에 달한다. 폭발 당시 만들어진 폭 40km의 버섯구름은 67km 상공까지 치솟았고, 섬광은 1000km 떨어진 노르웨이·그린란드·알래스카에서도 관찰되었다. 이 수소폭탄을 비행기에서 지상으로 바로 투하하면 조종사가 폭발을 피할 시간 여유가 없어서 목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낙하산을 이용해 속도를 늦추어 하강시킨 다음 4km 상공에서 폭발시켰다. 폭발 지점 반경 40km 이내가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강도 5.0의 지진이 발생했으며, 지진파가 지구를 세 번 돌았다. 그나마 폭발 강도를 반으로 조정해서 그렇지, 원래 설계 그대로 핵융합을 일으키면 산출력을 100메가톤까지 키울 수도 있다. 이 정도면 인류 전멸의 길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인류는 이 강력한 힘을 스스로 통제할 지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주경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