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

히틀러·스탈린의 핏빛 경쟁… 1400만명이 죽었다

최만섭 2021. 3. 6. 10:25

히틀러·스탈린의 핏빛 경쟁… 1400만명이 죽었다

‘폭정’ 쓴 역사학자 스나이더의 책

김성현 기자

입력 2021.03.06 03:00 | 수정 2021.03.06 03:00

 

 

 

 

 

북스/피에 젖은 땅 글항아리

피에 젖은 땅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함규진 옮김|글항아리|832쪽|4만4000원

역사의 착시를 빚어내는 건 언제나 시점이다.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스탈린과 히틀러를 반대편으로만 여긴다. 히틀러는 악의 제국인 반면, 스탈린은 미국 루스벨트와 영국 처칠과 함께 싸웠던 연합국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정’ 같은 저작으로 친숙한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교수)는 정색하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을 살육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동유럽인 폴란드와 발트 3국(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일대가 학살의 현장이었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사실상 범죄를 주도했던 ‘공범(共犯)’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대담한 주장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피에 젖은 땅(Bloodlands)’이다. 스나이더는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성찰을 담은 ‘폭정’이나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때문에 정치학자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은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그의 전공 분야다.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 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 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라고.

대량 학살이라고 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악명 높은 가스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학살은 이미 1930년대 소련에서 시작됐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집단 학살은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 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 작품이었다”고. 가스실이나 총살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굶주림이었다. 저자는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고 말한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히틀러(왼쪽)와 스탈린은 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폭정’의 저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1400만명에 이르렀던 20세기 유럽의 대량 학살이 이들의 ‘공동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위키피디아

학살을 먼저 시작한 쪽은 히틀러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1928년 경제 5개년 계획에 돌입한 스탈린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몰수해서 집단 농장을 만드는 집단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소련의 계획은 우크라이나 곡창 지대에서 300만명의 아사(餓死)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저자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우선 농민이 가축을 팔거나 도살했고 우수한 농민들은 추방당했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열심히 일할 이유를 잃고 말았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소수 민족 탄압이라는 점에서도 ‘닮은꼴’이었다. 1930년대 기근이 만연하자 스탈린은 정책 실패를 숨기기 위해 ‘우크라이나 부농(富農)’과 ‘폴란드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학살을 저질렀다. 1938년 말까지 소련이 출신 민족을 이유로 처형한 사람은 나치 독일의 1000배가 넘었다. 같은 해 독일 역시 유대인 재산을 박탈하고 핍박을 벌였다.

인민과 계급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던 소련이 어두운 밤을 틈타 끌고 가는 식으로 비밀스럽게 일 처리를 했다면, ‘게르만족의 지배’를 염원했던 나치 독일은 가식조차 없이 노골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정도가 차이였다. 1939년 악명 높은 독소(獨蘇) 불가침 조약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 위한 공모와 다름없었다. 결국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2차 대전의 참화로 이어졌다. 폭력의 점증 과정에서 전쟁은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그 야만의 종착점에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 있었다.

불과 2년 뒤인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조약은 깨졌다. 하지만 전쟁 과정에서도 소련의 일국(一國)사회주의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판박이였다. 피해자인 동유럽 주민들의 입장에서 히틀러의 전쟁은 스탈린 대학살의 ‘재판(再版)’이었다. 저자는 “첫 번째 대규모 기아(스탈린)에서 살아남은 이 대부분이 두 번째 기아(히틀러)에서 숨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기록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식량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20세기 유럽사라고 할 수 있다.

기아와 학살로 점철된 이 책을 읽는 건 정서적으로도 쉽지 않다. 스탈린의 대학살을 기록한 초반 1~3장이 핏빛이라면, 히틀러의 전쟁 야욕을 묘사한 중반 4~8장은 잿빛에 가깝다. 하지만 유럽의 반대편에서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겪었던 우리 입장에서 이 책은 종종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책 후반의 643쪽에서 그들의 비극은 우리의 비극과도 맞닿는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 이주됐던 바로 그 사람들을.” 요즘 말로 ‘피해자 중심’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책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과연 동북아의 십자로에 있는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