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뉴스 읽기] 英 BBC도 위기… 지상파 반납후 온라인 방송으로 전환
쪼그라드는 공영방송
입력 2021.03.05 03:00 | 수정 2021.03.05 03:00
지난해 KBS 수신료를 환불받은 가구가 3만6273가구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2016년 1만5746가구에 비하면 4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정권 편들기와 편파 방송에 대한 분노가 수신료 거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방송 환경 변화와 그에 따른 공영방송 역할 축소가 수신료 징수에 거부감을 갖는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상파 안테나로 KBS를 직접 수신하는 가구는 지난해 기준 2.3%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다. TV가 없는 가구도 2018년 3.5%에서 2020년 5.7%로 느는 추세다. 반면 유료 방송 가입 가구는 92%를 넘는다. 이러니 인터넷 맘카페에는 “지상파 TV를 아예 안 보는데 왜 시청료를 내란 거냐?”는 항의가 올라온다. 다매체·다채널·모바일이라는 새로운 방송 환경이 시청자의 채널 선택과 시청 방식에 혁명적 변화를 부르면서 “TV 수상기 있다고 수신료 걷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서울 서초구에 사는 주부 이모씨는 목요일 밤 회사원 남편과 함께 거실에서 TV로 미스트롯 결승전을 시청했다. 이후 남편은 서재로 들어가 IPTV 전용 단말기로 골프 강습 채널을 봤다. 그 사이 두 아이는 각자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축구 마니아인 아들은 휴대전화로 유럽 프로축구를, 딸은 “집콕으로 찐 살을 빼야 한다”며 태블릿 유튜브에서 K팝 걸그룹 춤을 검색했다. 이씨는 “채널이 많아지고 시청 방법도 다양해지면서 지상파 방송을 하는 앞쪽 채널을 보는 일이 줄었다”고 말했다.
국내 지상파 방송과 종편 4사, 보도 전문 채널, PP(program provider) 등을 합하면 채널이 수백 개에 이른다. IPTV,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유튜브 개인 방송까지 합하면 사실상 무한대다. 지상파 거물로 군림해온 KBS·MBC·SBS가 이런 변화의 직격탄을 맞았다. 10년 전만 해도 주도권을 쥐었던 지상파 방송은 종편 등 새로운 방송 플랫폼이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영향력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연도별 시청 점유율’ 조사를 보면 방송 주도권 이동이 확연히 감지된다. 시청 점유율은 시청률을 100%로 봤을 때, 그 안에서 각 방송사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KBS·MBC·SBS 지상파 3사 시청 점유율 합계는 종편 출범 이듬해인 2012년만 해도 63%를 넘었다. 그러나 2017년 48%를 찍으며 절반 아래로 떨어졌고 2019년에는 43%대까지 밀렸다.
채널만 다양해진 게 아니다. 시청 행태도 바뀌고 있다. 시청자들은 모바일 기기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거나 이동하면서 TV를 본다. 방통위가 지난달 발표한 ’2020년도 방송 매체 이용 행태 조사'에 따르면 최근 1주일 동안 지상파 TV를 한 번이라도 시청한 사람 비율은 2017년 97.5%에서 2020년 91.7%로 하락하며 90% 선을 위협하고 있다. 지상파 채널을 전혀 안 보는 시청자가 10%에 가까운 것이다. 10대와 20대 젊은 층에선 이 수치가 80% 초반까지 떨어졌다. ‘다시 보기’로 시청할 때는 TV 수상기를 이용하는 비율이 21.7%에 불과했다. TV 수상기 대신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기기, PC 등으로 본다는 얘기다. 다시 보기를 하는 이유도 ‘보지 못한 방송을 보기 위해서’(46.3%)보다 ‘원하는 시간에 보기 위해서’(50.6%)가 높았다. ‘방송국이 틀어주는 시간에 맞춰 시청한다’는 오랜 패러다임이 깨진 것이다. 양방향 소통과 실시간 시청자 참여를 강조하는 뉴미디어 트렌드를 지상파가 따라잡기 어렵다는 점도 꼽힌다. 황근 선문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는 “변화의 핵심은 모바일로 인한 개인화”라며 “공동 시청과 실시간 시청 문화는 사실상 사라졌고, 프로그램 완성도보다 시청자 참여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10
종편과 방송 채널 사업자인 CJ ENM이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있는 것도 지상파 영향력 축소를 가속한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발표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TOP 20’에서 종편과 tvN이 절반 넘는 11개를 차지했다. 지난해 2월엔 8개였다. 시청자들 사이에 ‘드라마는 tvN, 예능은 TV조선’이란 식으로 새로운 각인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도깨비’ ‘사랑의 불시착’ 등 드라마를 연속 히트시킨 tvN과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아내의 맛’ 등을 앞세워 예능 강자로 부상한 TV조선이 변화를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청률 조사 기관 TNMS의 2014년 예능 시청률 조사에서 종편과 CJ 계열 프로는 30위 안에 하나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2020년 조사에선 TV조선이 10위 안에 6개, tvN과 MBN이 20위 안에 1개씩 들어가며 지상파와 경쟁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대표하는 OTT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DVD 구독으로 시작해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전환한 넷플릭스는 전 세계 190여 국가에서 영화·드라마 시청 패턴을 바꾸며 미디어 생태계를 흔들어놓았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시청자의 선호도를 파악하고, TV로 보던 것을 스마트폰에서 이어 볼 수 있게 하는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선보였다. ‘기존 업계가 신생 스타트업에 잠식당한다’는 뜻의 신조어 ‘넷플릭스당하다’(netflixed)가 만들어질 정도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상파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드라마든 예능이든 뭘 찍어도 시청률 10%는 나온다던 호시절은 갔다. 작년엔 시청률 0%대를 찍은 드라마도 나왔다. 흥행을 보증한다던 지상파 연말 연예·드라마 시상식 시청률도 급감했다. 10년 전만 해도 KBS 연예대상이 15%(TNMS 기준)를 기록했고 다른 시상식들도 10%를 넘겼다. 더는 아니다. 지난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MBC 연예대상이 7%에 머물렀다. KBS가요대축제는 3%에 그쳤다. 시청자가 좋아하는 가수나 연기자가 종편으로 옮겨 가면서 지상파 연말 시상식은 그들만의 잔치로 축소됐다.
지상파 뉴스가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시절도 갔다. TNMS 조사에 따르면 2011년 18.5%에 이르던 KBS뉴스9 시청률은 16.8%(2014년), 14.5%(2017년), 12.3%(2020년)로 하락 추세다. 정치 성향에 따라 시청자들이 대거 종편으로 옮긴 것도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보편적 시청층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지상파가 잘나가던 시절 방식이고, TV를 선별해서 보는 시대엔 맞지 않는다”며 “대상층을 명확히 정하고 콘텐츠를 만들지 않으면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英 BBC도 위기… 지상파 반납후 온라인 방송으로 전환
“공영방송 망각의 시대에 진입”
다매체·다채널 환경에서 세계 각국 공영방송도 위기를 맞고 있다. 재난 안내, 교양 다큐, 농촌 정보 등 기존 공영방송이 수행해온 기능을 다양한 상업 방송과 인터넷에서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서 코로나19 관련 뉴스나 정보를 얻는 매체만 해도 스마트폰(52.5%)이 TV(44.6%)를 앞지르고 있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미디어 풍요 속에서 공영방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예 사라지는 공영방송 망각 시대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고 진단했다.
공영방송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할을 찾기 위한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2017년 온라인 플랫폼을 강화하는 혁신안을 내놓은 BBC가 대표적이다. 청소년 채널의 지상파 주파수를 과감히 반납하고 온라인 방송으로 전환하는 게 골자다. 인터넷 세대인 청소년층이 지상파를 외면하는 현실을 반영한 선택이다.
수신료 징수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지상파가 전부였던 시절 만들어진 공영방송 수신료 제도를 다채널 시대 시청자들이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 76%가 KBS 수신료 인상에 반대한다는 지난 1월 조사 결과도 있다. YMCA 시청자운동본부 한석현 팀장은 “KBS의 공영성 회복을 위해 시청료를 전기료에 합산하는 제도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팀장은 “KBS가 해마다 6000억원 넘는 돈을 걷으면서 그 돈이 왜 필요하고 어디에 쓰는지 시청자에게 설명하지 않는다”며 “전기료에 편하게 묻어 가는 걸 중단해야 이런 행태가 고쳐진다”고 말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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