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얌전하다는 말, 난 평생 칭찬인 줄 알았는데…

최만섭 2020. 11. 7. 06:22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얌전하다는 말, 난 평생 칭찬인 줄 알았는데…

[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입력 2020.11.07 03:00

 

 

모든 거북함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모든 거북함은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에, 너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에 거북함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입 속, 다른 누군가의 귓속에서만 이 모든 거북함의 원인을 찾지는 마시길…. /홍여사 드림

일러스트= 안병현

외출했던 남편이 귀갓길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냥 들어오기엔 눈부신 가을 하늘이 아깝다며, 근처 공원에라도 가자더군요. 저는 그러자고 대답하고, 옷을 입었죠. 새 마스크 한 장을 꺼내서 목에 걸고 신발장 문을 여는데 이번엔 문자메시지가 딩동 도착하네요.

 

“박 여사. 1층 커피집에서 따끈한 아메리카노 들고 기다리고 있소. 공기는 제법 차니 모자 쓰고 내려오시오.”

유머 감각은 제로인 60대 남편의 유일한 농담법인 ‘하오체’ 문장. 별 재미는 없어도, 이만하면 달달하기로는 남부러울 것 없건만 저는 이상하게도 쓴웃음부터 났습니다. 남편은 어떻게 아직도 모를 수가 있을까요? 제가 ‘박 여사’라 불리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편이 그렇게 부를 땐 귀가 까칠해집니다. 지난 30년간 간간이 눈치를 준 것 같은데도, 남편은 제가 그 호칭을 좋아한다고 여태 오해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평소엔 그저 여보, ** 엄마라고 부르다가도, 글로 쓰거나 농담을 할 때는 꼭 ‘박 여사’라 부르네요. 듣기 싫다고 하면 아마 되묻겠죠. 박 여사를 박 여사라 부르는데 뭐가 문제냐고요. 그저 농담으로 그러는 것뿐 불순한 뜻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고요.

 

그러고 보니 지난 주말의 일이 떠오릅니다. 아들 내외가 잠깐 집에 들렀었는데, 고맙게도 감기 예방에 좋다며 생강청을 사왔더군요. 장식 리본은 열 살 먹은 손녀가 달았다기에, 저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칭찬해주었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우리 수민이가 얌전하게도 묶었네.”

그런데 아이는 칭찬에 흡족해하는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게 묻더군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왜 저를 항상 얌전하게 잘했다고 하세요?”

“응?”

“글씨 보고도 얌전하게 썼다고 하시고, 쿠키 갖다 드렸을 때도 얌전하게 내왔다고 하시고, 카네이션 만든 것도 얌전하게 만들었다고 하시잖아요.”

“그야 얌전하게 잘했으니까….”

“얌전한 건 말썽 안 피우고 말 잘 듣는 거 아녜요?”

그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아이의 말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평생 써온 ‘얌전하다’는 말은 적어도 여자에겐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그 말을 들으면 우쭐해 했었고, 누구나 그런 줄 알았지요. 그런데 21세기에 태어난 손녀에겐 그게 생뚱맞은 소리로 들렸나 봅니다. 저는 좀 거들어 달라는 뜻으로 곁에 있던 아들 며느리를 쳐다보았지요. 그런데 아들은 아무런 말이 없고, 며느리는 오히려 한술 더 뜨네요.

“어머니, 요즘 애들한테는 얌전하다는 말이 마냥 좋게는 안 들릴 수 있어요. 그냥 잘했다, 멋지다, 완벽하다 해주시면 돼요.”

“오. 그러냐…?”

저는 그 한마디로 상황을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서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우선은 세대 차이가 이런 거로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에, 얌전하게 잘했다는 말이 불편하게도 들릴 수 있다니. ‘말썽 피우지 말고 고분고분한 아이가 돼라’는 강요가 섞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런 생각 없이, 순전한 칭찬의 뜻으로 한 말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제가 그 말을 남들보다 자주 쓴다는 게 문제일 수도 있겠더군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득 며느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우리 며느리도 그동안 ‘얌전하다’는 내 입버릇에 반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오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지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긴 유독 나만 듣기 싫어하는 말이 누구에게나 있지요. 상대방은 선의로 한 말인데, 나는 듣기 싫은 말. 특히 그 상대방이 시어머니일 때는 싫다는 말도 못 하고 꼼짝없이 수십 년을 들어야 하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은 저를 칭찬하실 때 꼭 “그건 잘 배웠구나” 하셨습니다. 친정에서 제대로 배워왔다는 의미이셨을 텐데, 저는 그 말이 참 듣기 싫었습니다. 마치 우리 친정엄마가 저를 시어머니에게 갖다 바치기 위해 가르치고 키운 것 같아서요. 하지만 어머님께 한 번도 내색하진 않았죠. 아마 어머님은 꿈에도 모르셨을 겁니다. 잘 배워 와서 흡족하다는 말에, 며느리는 뾰로통해지곤 했다는 것을요. 만일 제게도 딸이 있어, 그 딸이 어머님께, “할머니는 왜 자꾸 잘 배웠다고 하시느냐?”고 물었다면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당황해서 딸아이를 타일렀을 겁니다. 할머니께서 뭐든 제대로 배우는 네 영특함을 칭찬하시는 거라고요.

 

세대 차이란, 어떤 말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될 때, 대처 방법이 다른 것이 더 큰 차이지요. 우리 손녀는 궁금하면 묻는 세대, 듣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세대입니다. 한편 며느리는 싫다는 뜻을 비칠 기회를 노리는 세대겠죠. 저는 뭐 말 그대로 사라져가는 구세대입니다. 싫어도 안 싫은 척, 왜 나는 이토록 그게 싫은지 한번 따져볼 생각은 없이, 싫은 마음을 감추기 바빴던 세대. 그러나 적어도 우리 시어머니 세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죠. 상대방이 거북해하면 안 해야 합니다. 열 살 손녀에게도 그 아이가 원하는 단어와 표현으로 칭찬해줘야 마땅합니다. 얌전히 잘했다는 말 대신, 멋지다, 시크하다, 완벽하다.

 

이래저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의 세계. 모든 것이 멀어지고 버거워지는데 그래도 단 한 사람 남편만은 점점 더 낮은 자세로 곁에 다가오니 희한합니다. 아마도 지나온 세월에 미안한 게 많아서, 앞으로도 신세 질 일이 남아 있어서 그러는 거겠죠. 1층에서 커피 들고 ‘박 여사’를 기다린다는 남편에게 오늘은 저도 속 시원히 말해버릴 참입니다. 그 묵은 농담은 이제 그만 사절이라고요. 나를 웃게 하려면 내가 원하는 단어들로 웃겨달라고요. 선보고 석 달 만에 결혼해서, 시어머니 모시고 살았던 우리의 가난했던 청춘. 애교 한번 떨어보기 전에, 남편 사랑 한번 진하게 느껴보기 전에 저는 이내 ‘박 여사’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니라 하겠지만, 그 호칭엔 무의식적인 거리 두기가 있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깨 볶는 신혼 재미보다 맏며느리에 형수 역할이 더 시급하다는. 불타는 청춘은 건너뛰고 어서 굳건한 중년 부부로 거듭나자는 의미가요.

 

이제 와 생각하면, 그렇게 세월을 재촉했던 게 남편도 후회스러울 겁니다. 현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니 저는 이제 박 여사를 지나 박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네요. 하늘나라의 어머니들이 내려다보시면 저를 칭찬해주실까요? 우리 딸 얌전하게 늙었구나. 우리 며느리 인생을 참 잘 배웠구나. 이제는 저도 그 말들을 아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텐데요.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1층에서 커피 들고 기다리는 남편. 저는 그에게 전혀 얌전하지 않은, 배워먹지 못한 답장을 후딱 날려보냅니다.

“박 여사는 너무 늙고 지쳐서 못 내려가고 옥란이가 지금 내려갑니다. 황 영감은 집에 보내버리고 용식씨가 기다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