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리어왕’ 대사 몽땅 잊은 남자… 65세 제게 딱 맞는 배역이죠

최만섭 2020. 11. 4. 05:29

‘리어왕’ 대사 몽땅 잊은 남자… 65세 제게 딱 맞는 배역이죠

9년만의 연극 복귀… ‘더 드레서’로 돌아온 배우 송승환

이태훈 기자

입력 2020.11.04 03:00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배우들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위대한 연극 작품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우 송승환이 연극‘더 드레서’속 셰익스피어 극단의 노배우‘선생님’의 리어왕 왕관을 쓰고 분장실에 앉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너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지금이‘더 드레서’의 노배우를 연기할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일부러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오는 18일 서울 정동극장에서 개막하는 연극 ‘더 드레서’의 극 중 대사다. 코로나 시대, 관객이 있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에 대한 우려 이야기를 꺼내자, 배우 송승환(63)은 이번 연극 속 역할 ‘선생님(Sir)’의 대사로 답했다. “제가 ‘난타’ 공연을 처음 한 게 1997년 IMF 사태 때였어요. 이제 와서 보면 난타의 두들김이 지친 사람들에게 새 용기를 준 게 아니었나 싶어요. 연극이 무언가를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는 있죠.”

‘더 드레서’는 올 연말 기대작으로 첫손에 꼽힌다. 영화 ‘피아니스트’(감독 로만 폴란스키)로 2003년 오스카 각색상을 받은 극작가 로널드 하우드 원작 희곡. 안재욱, 오만석, 정재은, 배해선 등 신뢰받는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선다. 2차 대전 중 영국의 오래된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 제작자이자 배우로 평생 주인공만 하며 늙어온 ‘선생님’ 이 리어왕 개막 40분을 앞두고 대사를 몽땅 잊어버리면서 극장은 대혼돈에 빠진다. 오래 그의 손발이 돼 도와온 의상 담당 ‘노먼’(안재욱·오만석)이 수습에 나선다. “전쟁 중인 연극 속 영국에선 연기 좀 할 줄 아는 사람은 다 입대하고, 대관하는 족족 극장은 폭격을 맞죠. 코로나 사태도 전쟁 아닌 전쟁이잖아요? 게다가 배우이자 제작자인 ‘선생님’ 이야기에 65세의 송승환이 겹쳐지는 부분이 많았어요.”

 

송승환의 연극 복귀는 체호프의 ‘갈매기’(2011) 이후 9년 만. 정동극장은 제작자였던 ‘난타 99’ 이후 21년 만이다. 연출가·제작자로 산 기간이 길었는데도 그는 “그냥 ‘지금부터 배우다’ 하면 그냥 배우가 된다”고 했다. “9살 때부터 연기를 했으니까요. 배우가 참 좋은 게, 나이 들면 나이 든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제가 마흔에 ‘선생님’ 역할을 만났으면 아직 설익어 제대로 못 해냈을테고, 여든에 한다면 체력이 안 되겠죠. 공감대, 감성, 체력이 잘 맞아떨어져서 최고의 ‘선생님’을 보여드릴 수 있는 적기에 만난 것 같아요.”

 

‘더 드레서’는 ‘김종욱 찾기’ ‘그날들’ 등 뮤지컬 흥행작에 최근엔 영화감독까지 영역을 넓힌 장유정 연출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송승환은 개⋅폐막식 총감독으로, 장유정은 부감독으로 호흡을 맞췄다. 송승환은 “연극은 ‘큐 타이밍’이 중요하다.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나오는 단 1, 2초의 타이밍이 작품 전체를 좌우하는데, 장유정은 그 방면에서 내 성격과 비슷한 완벽주의자”라고 했다.

 

송승환은 9월 초 배우들과의 상견례 겸 첫 대본 읽기 때 자기 대사를 모두 외워와 후배 배우들을 놀래켰다. 덕분에 다른 배우들도 모두 초고속으로 대본을 외웠고, 연습 시작 2주 만에 ‘런’(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하는 연습)에 들어갔다. “미안하더라고요. 실은 제가 대본을 들고 읽지 못 해 그냥 외워버린 건데.” 그가 지갑에서 시각 4급 장애인증을 꺼냈다. “평창올림픽 뒤 날벼락처럼 6개월 안에 실명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죠. 정말 앞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2018년 말에 기적처럼 시력 악화가 멈췄어요. 태블릿을 눈앞에 대고 손바닥만하게 글자를 키워야 읽을 수 있을 정도지만, 그게 어딘가요.” 시력 때문에 상대 배우와 연기 호흡에 어려움은 없을까. “사람이 놀랍더군요. 눈이 나빠지니 귀가 밝아져요.”

 

연극의 도입부, ‘선생님’이 유서처럼 쓴 노트가 등장한다. 지문엔 ''나의 삶' 아래는 비었다'고 돼 있다. 송승환에게 바로 그 ‘나의 삶’ 아래 첫 줄을 뭐라고 쓰고 싶은지 묻자, 그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쓸 것”이라고 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쓸 것 같아요.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파란 하늘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해요.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한데, 연기까지 다시 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이태훈 기자 편집국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