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최보식이 만난 사람] “그날 밤 총과 日本刀 든 검은 그림자들… 마을 전체가 초상집 되는 참극 벌어져”

최만섭 2020. 11. 2. 05:32

[최보식이 만난 사람] “그날 밤 총과 日本刀 든 검은 그림자들… 마을 전체가 초상집 되는 참극 벌어져”

‘인간 사냥’이었던 1949년 박사리 사건 아십니까…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 출간한 박기옥씨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20.11.02 03:00

 

 

“그날 밤 동네 젊은이 38명이 영문도 모른 채 무장 공비에 의해 학살됐습니다. 간신히 목숨 건진 부상자 16명도 평생 불구자로 지냈습니다. 전쟁통도 아닌 평시(平時)에 한 마을 전체가 초상집 되는 참극이 빚어진 겁니다. 못 배운 유족들은 어디에 하소연할지를 몰라 70년 넘게 세월만 보냈습니다.”

박기옥(71)씨로부터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고 10월 30일 동대구행 KTX를 탔다. 역에서 내려 팔공산 방면으로 50여분 차를 달리자, 도로변에 ‘박사마을’ 표지석이 나왔다. 행정 지명은 경북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다.

 

팔공산 무장공비

이날 마을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동네 노인 스물댓 명과 자유총연맹 지부 사람들이 참석했다.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같은 화려한 외빈(外賓)은 없었다.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한 뒤 서로 막걸리 몇 잔 나누는 게 전부였다. 코로나 탓만은 아니었다. 71년 전 박사리에서 벌어졌던 좌익 세력의 잔혹한 학살극이 그동안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안에서 이념 대립으로 좌익 폭동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6·25 전란 통에 벌어졌던 ‘양민 학살’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무 죄 없는 마을 젊은이들을 상대로 사냥을 한 겁니다. 그날 밤 8시쯤 무장공비 50여명이 산에서 내려와 2시간 동안 무자비한 살육을 했던 겁니다. 집집마다 불을 질러 108채가 전소했습니다.”

박기옥씨는 “못 배운 유족들은 어디에 하소연할지 몰라 70년 넘게 세월만 보냈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박기옥씨는 그때의 자취는 전혀 남아있지 않는 마을을 안내했다. 그의 집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지점에 있었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나왔다. 그 뒤 검정고시와 고교 편입 등을 거쳐 방송대까지 마쳤다. 그는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현재는 윤활유 가게를 하고 있다.그런 그가 몇 년 전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라는 책을 낸 적 있다.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박사리 사건은 1949년 11월 29일 밤에 일어났다. 총과 죽장, 긴 칼을 든 검은 그림자들이 마을을 점령했다. 그들은 중요한 연설을 한다며 사랑방에서 놀고 있던 청·장년을 끌고 나왔다. 총알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먼저 몽둥이로 뒤통수를 치고 뒤이어 일본도를 휘둘렀다.〉

―'박사리 사건'을 검색해보니 개괄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더군요. 역사 속에 완전히 묻혀 있던 사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건 개요는 나와 있지만, 그날 밤 마을에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참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부 기록에도 없습니다. 국가기록원과 경북지방경찰청, 경산경찰서 등에 요청했지만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시일이 너무 오래돼 폐기됐거나 관리 소홀로 없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와 남선경제(매일신문의 전신)에서 기사를 찾아냈으나 오류가 꽤 있었습니다.”

―광복 직후 미군정 시절 공산당은 합법(合法)이었지요. 하지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년)’으로 공산당의 활동을 불법화했습니다. 연이어 대구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대구 10·1 사건)로 검거 선풍이 불자 박헌영 등 공산당 지도부는 월북했지요.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좌익 무장 세력인 ‘빨치산’이 조직됐습니다. ‘박사리 사건’은 당시 팔공산에 숨었던 빨치산에 의한 소행이었지요?

“팔공산에서 양식과 옷가지를 구하러 마을로 내려오곤 했다고 합니다. 무장공비들은 주로 관공서, 경찰지서, 우익청년단 사무실 등을 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박사리 사건은 유례없이 한 마을 전체가 살육과 방화의 대상이 됐습니다. 전시(戰時)에도 양민 학살과 방화는 ‘반인륜적 전쟁 범죄’로 처벌받습니다. 이를 전시도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에 저질렀던 겁니다.”

―빨치산이 왜 그런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다고 봅니까?

“이웃 마을 사람이 팔공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공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박사리에 산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목숨을 구해 내려와서는 곧장 경찰지서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신고로 군경합동 공비 토벌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그 공비 잔당들이 운문산 공비의 지원을 받아 마을을 습격해온 겁니다. 보복 공격을 군경에게는 못 하고 비무장 상태의 마을 사람들에게 했던 겁니다.”

―사건 당시 본인은 출생한 지 일곱 달인 갓난아이였는데, 유독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요?

“그날 큰아버지와 9촌 아저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오촌 당숙은 일본도에 베여 내장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짚단 속에 숨어 피했지만 정신적 충격으로 그 뒤 정상 생활을 못 했습니다.”

―본인의 직계 가족은 괜찮았습니까?

“모친 말씀으로는 ‘너희 아버지는 너 때문에 화를 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사랑방에 놀러갔다가, 어린 제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찍 왔다고 그랬다는군요. 사랑방에 더 계셨으면 운명이 달라졌을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이 사건을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그때 우리 마을은 같은 날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으니까요. 큰아버지 제사에 가면, 어른들끼리 ‘누구는 어떻게 죽었다 하더라’는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日本刀로 베다

예순 중반 나이에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라는 책을 출판했더군요. 살아온 경력을 보니까, 사건 취재나 인터뷰를 하는 훈련은 받지 못한 것 같더군요.

“수필 같은 문학적인 글은 써봤지만 이런 글은 사실 처음이었습니다.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의 목소리’ 같은 르포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은 수천 명을 인터뷰해 그때 비극을 전한 것이었지요. 그 책이 제게 용기를 줬습니다. 박사리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윤성해 유족회장 등이 제사 지내는 장면.

어떤 식으로 취재했습니까?

“가게는 뒷전에 두고 1년 반 여기에 매달렸습니다. 전국에 흩어진 사망자 유족, 중상자 가족 80여 명을 만났습니다. 몇 명은 전화와 편지로 했습니다. 당시 사망자는 1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자였습니다. 미혼이거나 갓 결혼한 경우에는 후손이 끊겼습니다. 제가 인터뷰할 때 중상자는 두 분이 살아계셨습니다. 가장 생생한 현장 증언을 했습니다. 그 뒤 이분들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책에는 당시 18세 청소년이 그날 겪은 얘기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동생과 함께 방에서 가마니를 짜고 있었다. 무장공비 세 명이 내 가슴팍에 총부리를 대고 정미소 마당으로 끌고 갔다. 마당에는 벌써 열댓 명이 끌려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뒤에서 공비 몇 명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한 사람씩 불러 세워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그 안에서 격한 비명이 들렸다. 나는 여섯 번째 순서로 불려갔다. 공비들은 몽둥이로 머리를 치고 일본도로 등과 목덜미를 벴다. 내가 쓰러지자, 뒤이어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이들은 내가 죽은 줄로 알았던 것 같다. 공비들이 물러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피칠갑이 돼있었다. 우리 집은 불타고 있었다. 이웃 어른 댁에 들어가니, 무명베 적삼을 찢어 칼에 베인 목과 등을 묶어줬다.〉

 

―이분은 2016년 인터뷰가 있고서 그해 85세로 사망한 걸로 되어있더군요.

“이분은 목덜미와 등에 칼을 맞아 평생 꼽추처럼 살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분은 인터뷰에서 ‘그날 밤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를 찾아 골목길을 헤맸다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때 일을 생각하니 아직 가슴이 아리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다른 부상자는 사건 당시 15세였다고 했지요?

“평소 잘 알던 분이었습니다. 동장(洞長) 아들이었고 인물이 출중했지요. 하지만 그날 칼에 맞아 한쪽 손목을 잃었고 어깨에는 깊은 상흔이 있었습니다.”

책에는 이렇게 기술돼있다.

〈사랑방에서 또래 예닐곱 명이 새끼를 꼬며 놀고 있을 때 공비들이 총을 겨누며 들이닥쳤다. 새끼줄로 그의 팔을 뒤로 묶었다. 힘을 줘 끊고 달아나려 하자, 날선 일본도로 목을 향해 내리쳤다. 빗나가 어깨를 베었다. 다시 휘두르는 칼을 왼손으로 막았다. 손목이 거의 잘리다시피 했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오른손으로 덜렁거리는 왼손을 싸잡고 집 뒷담을 타넘었다. 쌓아놓은 짚단 속에 들어가 숨었다.〉

 

춘자야, 춘자야

그의 책에는 일본 징용에 끌려갔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아버지를 잃은 딸의 증언도 나온다. 당시 아버지는 32세, 딸은 7세였다.

〈동생 둘과 단잠에 들었는데 집에 불이 났다는 엄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엄마는 난 지 석 달 된 남동생을 둘러업고는, 나와 여동생을 이불에 둘둘 말아 집 밖으로 끌어냈다. 엄마는 물동이로 불타는 지붕과 볏단을 향해 물을 뿌렸다. 이미 마을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그때 ‘춘자야 춘자야’ 하는 아버지의 울부짖음이 여러 번 들렸다. 내 이름을 불렀지만 실은 엄마를 부르는 소리였다. 아마 공비들에게 당하면서 절규를 했던 것 같다. 공비들이 물러가고 쓰러진 아버지를 찾았다. 얼굴과 몸에 온통 칼자국이었고 내장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아직 숨이 남아있었다. 엄마를 향해 ‘난 가망이 없으니 아이를 데리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했다. 집이 불타 갈 곳이 없어 이웃 어른 댁에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내가 울 때마다 엄마에게 많이 맞았다. 맞는 내 아픔보다 때리는 엄마의 가슴이 더 쓰라렸을 거다. 엄마는 교회 새벽 기도를 하루도 거른 적 없었다.〉

집안 농사일을 맡고 있던 남편과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박사리에서 살아남은 유족은 모두 힘든 세월을 보냈다. 자녀를 교육시킬 형편이 아니었고 가난은 대물림됐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정부나 언론기관에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그날의 비극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묻고 보상받아야 하는지도 여전히 모르고 있다.

 

최보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