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진미] 올가을에 산수화를 보고, 시를 써야 하는 이유
‘코로나 블루’ 길어지면서 올가을은 感性 관리 고민해야
여행 대신 산수화 감상하고 平遠 관점으로 관조 태도 연습
소셜미디어에 좋은 시 옮겨 적으면 감정의 소용돌이 정돈 효과
입력 2020.10.13 03:00
미학은 ‘감성의 학(學)’이다. 감정과 정서를 연구할수록, 감성의 영향력은 한 사람 삶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걸 깨닫는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가 사람들 마음에 타격을 주며 트라우마가 됐다. 올가을은 코로나 트라우마가 더 깊게 자리 잡기 전에 감정과 정서 관리를 시작해야 할 ‘골든 타임’이다.
/일러스트=박상훈
사회적 거리를 두고,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 어떻게 감성 관리를 시작할까? 예술로 도움을 받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동아시아 예술의 지혜를 제안하고 싶다. 서양 미술사에서 고흐가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지만, 엄밀하게 보면 감정과 정서에는 상당히 불안한 측면이 있다. 지금은 불안보다 안정을 목표로 감정과 정서를 관리할 때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좁은 하얀 방에서 수시간 동안 강도 높은 업무에 시간에 쫓기며 집중하면 그 압박감은 정서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강건한 사람일지라도 그 기간이 장기화하면 정서적으로 견디기 어렵다. 특히 이런 상태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사건에 직면하면, 내면의 방아쇠가 당겨질 수 있다.
첫째 제안은 작은 산수화를 거는 일이다. 쉽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작지만 멀리 볼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어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1000년 이상 산수화가 사랑을 받은 이유다.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시험으로 실력을 겨루고, 대의명분을 걸고 정쟁에 휘말리며 유배와 사약이라는 절체절명 순간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산수화를 감상하는 요령은 세 가지다. 산수화를 보면서 내 마음에 예술 산보를 선사한다. 중국 남북조시대 종병(宗炳)의 ‘와유(臥遊)’ 같은 식이다. 실내에서 산수화를 보면서 마음을 멀리 여행시킨다. 현대인은 직장 생활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쉽게 여행하지 못하는데 코로나19로 더 어려워졌다. 그럴 때 실내에 산수화를 걸어두고 마음을 여행시킨다.
산수화의 산을 보면서 내 마음이 관점 바꾸기를 연습하게 한다. 중국 송나라 곽희(郭熙)의 ‘삼원법(三遠法)’은 평원(平遠), 고원(高遠), 심원(深遠)의 3가지 관점을 설명한다. 동아시아 산수화는 다시점(多視點)으로, 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인 일시점과 다르다. 산수화를 보면서 높은 산에 올라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듯이 평원의 관점에서 수평으로 멀리 본다.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 보는 관조의 태도를 연습하는 것이다. 고원의 관점으로 산 아래서 위로 쳐다보면서, 즉 산을 올려보면서 겸손을 연습한다. 심원의 관점은 산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을 살피는 통찰을 연습하는 것이다.
산수화를 보면 내 마음의 작은 거인을 발견할 수 있다.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은 ‘소중현대(小中現大)’라면서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나타난다”고 했다. 명대는 마음 학문인 심학(心學)을 심도 있게 발전시킨 시기로, 산수화는 바로 내 마음의 이미지가 됐다. 소중현대의 미학으로 몸은 비록 작고 약할지라도, 마음은 저 산수처럼 광활하며 끝없이 펼쳐지는 무진의 세계라고 스스로 칭찬해 주면서 자존감을 가져 보자.
선승혜 대전시립미술관장
소셜미디어는 만인이 발언하는 광장이다. 소셜미디어에 나의 일상이며, 내가 들은 것이라고 쓴 공개된 글이 그 누군가에게는 미처 그 상황을 설명도 하기 전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설상가상으로 ‘박제’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상처를 준 글을 유지하겠다는 결기까지 보일 때는 두렵기까지 하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은 바이러스처럼 ‘퍼감’을 통해 전파된다. 글의 진위에는 관심이 없고, 조회 수를 늘리는 걸 목표로 한다. 원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글을 쓴 이는 자초지종을 이해하고, 경솔함을 후회하면서, 소셜미디어의 글을 비공개로 전환하더라도, 이미 퍼져 있는 글을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둘째 제안은 소셜미디어에 좋은 시를 옮겨 쓰는 것이다. 소셜미디어 포스팅은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분노가 치밀수록 비유와 은유가 풍부한 시를 옮겨 쓰면 좋다. 시의 모호함은 현재 직면한 사건에서 감정을 분리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시의 함축성은 말을 아껴서 표현하면서, 하나의 사건도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어서 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배려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동아시아에서 과거 시험을 시로 쓰고, 수많은 정쟁도 은유, 비유, 함축의 시를 활용한 이유다. 산문이나 경전은 전체를 베껴 쓰기 어렵지만, 시는 짧은 시간에도 글 전체를 옮겨 쓸 수 있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감정의 안전지대로 인도한다.
21세기 수양론은 마음 챙김의 예술과 동고동락해야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있을수록 정성껏 감정과 정서 관리를 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으로 감정과 관련된 기술을 개발하려 할 때, 그저 개개인 정보 데이터로 취향을 분석하여 광고나 추천 마케팅에 사용하는 것보다, 자신을 아껴주는 자기자비(self-compassion)와 타인을 나처럼 아껴주는 공감을 위한 건강한 정서에 도움이 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면 좋겠다.
선승혜 대전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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