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의 맛 세상] 민어는 어떻게 여름 보양식계 '존엄'이 됐나
조선일보
입력 2020.07.09 03:12
민어 남획으로 씨 말라 잊은 사이 삼계탕이 '국민 보양식' 타이틀 차지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초복(初伏)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요즘 최고 인기 보양식을 꼽으라면 민어인 듯하다. 서울 한 일식집 주인은 "7~8㎏ 이상 나가는 먹을 만한 민어는 ㎏당 9만원이나 한다"며 "아무리 초복 직전이라 그렇다지만 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고 혀를 내두른다. 닭과 인삼이라는 두 강자가 연합한 삼계탕, 스태미나의 상징 장어, 보신탕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어떻게 민어는 여름 보양식계 '존엄'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민어는 오래전부터 여름 보양식으로 사랑받았다. "민어탕이 일품(一品), 도미탕이 이품(二品), 보신탕이 삼품(三品)"이라는 말이 있었다. 보신탕은 평민이 먹고, 민어탕은 사대부가 먹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비싸진 않았다. 민어가 흔했기 때문이다.
민어는 여름이 제철이다. 8월 산란기를 앞두고 몸집이 커지고 기름도 가장 오른다. 민어는 서해, 전남 신안 일대 바다에서 산란한다. 전남 신안 임자도·재원도 토박이들은 "여름 산란기가 되면 알 낳으러 몰려든 민어 떼가 '꺽꺽' 우는 소리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민어잡이 배가 하도 많아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이 잡히는 만큼 흔히 먹는 생선이 민어였다. 서울 토박이인 70대 어머니는 "어릴 땐 민어포를 대구포나 북어포보다 더 자주 먹었다"고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민어는 정부가 물가를 조사할 때 빠지지 않는 품목이었다. 1969년 5월 17일 자 동아일보 '여름 물가 소비자 노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민어 가격은 한 관(3.75㎏)에 1800원.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4만5000원쯤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사 먹을 수준이다. 그야말로 '백성의 생선'이라는 민어(民魚)의 한자 뜻풀이에 걸맞았다.
평범한 생선이던 민어가 귀한 신분으로 격상한 건 남획 때문이다. 어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민어 어획량이 증가하다가 1970년대 정점을 찍고 급락하면서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생선 가게에서 보기도 힘든 생선이 됐다.
일러스트=이철원
이때 치고 들어온 보양식이 삼계탕이다. 1960년대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가 조사한 데 따르면, 삼계탕이라는 단어는 1923년 일제 총독부가 작성한 '중추원조사자료'에 처음 나온다. '여름 3개월간 매일 삼계탕 즉 암탉의 배에 인삼을 넣어 우려낸 액을 정력약으로 마시는데, 중류(中流·중산층)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
삼계탕이 외식으로 등장한 건 1950년대 중반이다. 그때는 닭을 인삼보다 앞세워 '계삼탕'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처갓집 온 사위에게 씨암탉 잡아주던, 닭이 귀하고 비쌌던 시절이다.
양계 산업이 본격화한 1960년대 삼계탕도 대중화한다. 최고의 보양식 타이틀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보신탕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보신탕이 해외에서 논란이 됐고, 보신탕집은 서울 4대문 밖으로 쫓겨난다. 삼계탕은 때를 놓치지 않고 국민 여름 보양식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삼계탕의 권좌가 1990년대 들어 흔들렸다. 음식은 맛과 영양만큼 가격이 중요하다. 독일 본 대학과 프랑스 인세아드(INSEAD) 경영대학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레드와인 3병을 주었다. 병당 각각 3유로, 6유로, 12유로짜리라고 알려줬다. 실제로는 모두 같은 와인이었다. 실험 대상자는 대부분 "12유로짜리 와인이 가장 맛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가격은 음식에 대한 만족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보양식은 특히 그렇다. 귀하고 값비싼 재료라야 한다는 심리가 있다. 그런데 닭과 인삼은 너무 싸고 흔해진 것이다.
그러자 잊었던 민어가 소환됐다. 2000년대 중반쯤부터 신문과 방송에 민어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과거 민어는 서해를 끼고 있는 전라도와 충청도, 서해에서 배로 올라올 수 있는 서울에서 주로 먹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민어를 찾으면서 그러잖아도 비쌌던 민어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민어가 여름 보양식계 지존으로 등극한 이유다.
다행히 양식 민어가 2014년쯤부터 시 장에 풀렸다. 민어는 성질이 예민한 데다 상품(商品)으로 판매할 정도 크기가 되려면 4~5년은 키워야 해 양식이 쉽지 않지만 성공한 것이다. 양식 민어가 나오면서 민어 가격이 차츰 떨어지고 있다. 민어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양계 산업이 본격화하면서 삼계탕 인기가 하락한 것처럼, 민어도 최고 보양식 자리를 곧 내줘야 할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9/2020070900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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