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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타다 사라질, 우리 사랑을 응원해

최만섭 2020. 7. 7. 05:47

 불꽃처럼 타다 사라질, 우리 사랑을 응원해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입력 2020.07.07 03:14

 

김윤덕 문화부장

 

코로나가 주춤한 틈을 타고 가족여행을 결정했을 때 경주로 가야 한다고 우긴 건 엄마였다. 4년 전 대지진이 할퀴고 간 이 국보급 도시가 잘 회복돼 가고 있는지 봐야 한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근인가 호박인가 하는 중고매매 사이트에서 코로나 특가로 나온 보문단지 호텔 숙박권을 반의 반값에 득템한 엄마는, 연방 터져 나오는 함성을 손으로 틀어막다 사레에 걸렸다.



가족여행이라지만 엄마와 나, 단둘이었다. 아빠는 탈북자도 아닌데, 내가 열 살 때 '자유'를 찾아 떠났다. 여름방학식날, 붉은 꽃매미들이 죽어 널브러진 학교 앞에서 거대한 배낭을 짊어진 채 서 있던 아빠는 "사랑해, 곧 데리러 올게" 하고 손을 흔들었다. 외할머니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사내라고 좋아 죽더니 꼴 좋~다"며 으르딱딱거렸지만, 난 아빠가 부러웠다. 열무된장밥을 푹푹 퍼먹으며 으르렁대는 엄마 옆에 엎드려 한 손엔 망원경, 한 손엔 세계지도를 든 남자가 열기구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그림을 그렸다.



신경주역까지 오는 동안 엄마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과정을 연도까지 짚어가며 열강했다. 야근해 충혈된 눈으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성적이 올라간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필 그때 내 입에서 금기어가 튀어나왔다. "기차여행의 백미는 삶은 계란에 사이다라고 아빠가 그랬지." 엄마의 SLBM급 말 폭탄이 쏟아지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누굴 닮아 집중력이라곤 일도 없니? 책은 안 읽고 유튜브만 보니 머리서 깡통 소리가 나지. 태종무열왕 되는 사람이 김춘추랬어, 김유신이랬어? 이거 다 시험에 나온다고 했어 안 했어?" 초토화된 자존심에 나도 소총 한 방을 날렸다. "그럼 엄만 알타미라 벽화랑 반구대 암각화에 공통으로 새겨진 동물이 뭔지 알아? 떡메, 인스, 다꾸, 스라벨이 뭔지 아냐고? 것두 모르면서. 교과서를 앵무새처럼 읊느니 멍 때리는 게 낫다고 아빠가 그랬어, 아빠가!"

 

/일러스트=이철원

 



쾌적한 호텔방에서 화사 언니의 신곡을 들으며 2박 3일 웹툰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려던 바람은 기차간에서의 도발로 물거품 됐다. 수백의 연등이 꽃대궐을 이룬 불국사에서 엄마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김대성 설화와 다보탑·석가탑의 차이를 강변했다. 석굴암의 신비를 음미할 겨를도 없이 다시 첨성대로 달려갔고, 신라의 보물창고라는 천마총만 무려 1시간을 관람했다. 경주의 핫플이라는 마켓338에서 아이엠어버거를 먹고, 화랑의 언덕에서 뛰놀다, 교리김밥 사서 경주 야경을 둘러보는 따위는 엄마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영혼이 가출 경보를 울릴 때쯤 차는 경주를 벗어나 감포로 들어섰다. 라디오에서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빠는 광기의 팬덤을 가졌다는 점에서 노무현은 박정희 대통령과 닮았다고 했었다. 라디오를 꺼버린 엄마는 감포로 가던 호젓한 국도가 멋대가리 없는 고속도로로 변했다며 혀를 찼다. 감은사 터에 우뚝 선 두 개의 탑만이 엄마를 위로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으면서 날 동해바다에 묻어라,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켜주겠노라 유언했대. 저기 저 바닥에 통로 보이지? 용이 된 왕이 바닷물을 타고 들어왔다가 나가던 길." "말이 돼?" "문무왕 같은 애국자가 한 사람만 있어도 풍전등화의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텐데. 정의로 쌈 싸먹고 평등으로 뒤통수 치는 좀비들을 아작낼 영웅이 나타나야 할 텐데." 강박에 가까운 엄마의 저 우국충정도 아빠를 열기구에 태워 보낸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빠에게서 온 소식을 전한 건, 대왕암이 보이는 바닷가 모래밭에 나란히 앉았을 때였다. "드디어 아틀란티스를 찾았대. 돈도, 종교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래." 왕의 수호신인 양 흰 갈매기들이 집결한 바위섬을 응시하던 엄마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그런 곳은 없어. 삶이란… 내가 지금 발 딛고 선 이곳에서 피 터지게 싸워 쟁취하는 거야. 도망가는 게 아니라고."

수평선 너머 노을이 졌다. 희끗해진 엄마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꽃잎 같은 귀 에 이어폰을 꽂아주었다. 아빠가 좋아했던 혁오의 '톰보이'. 취향도, 삶의 목표도 정반대였던 두 사람은 어쩌다 사랑에 빠진 걸까. 불꽃처럼 위태로운 남자를 엄마는 바위처럼 지켜주고 싶어 했었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잖아/ 나는 사랑을 응원해….' 붉은 파도가 사람들의 그림자를 덮쳤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7/20200707000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