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세상읽기]바꾸지 않는 용기

최만섭 2020. 6. 23. 21:51

[세상읽기]바꾸지 않는 용기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입력 : 2020.06.23 03:00 수정 : 2020.06.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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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한 자나 가장 영리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찰스 다윈의 말이다. 아니, 찰스 다윈이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다윈은 워낙 유명한 과학자이므로 그의 모든 글은, 심지어 사적인 편지까지도, 데이터베이스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다윈은 절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사실 이 문장은 1963년, 루이지애나 주립대 레온 매긴슨 교수가 한 사회과학협회에서 이야기한 연설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다윈의 주장을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석유 관리를 다루는 논문 첫머리에 실렸고, 몇 년 후 <원유와 아랍 지역 개발>이라는 책에 인용되었다. 이후 점점 다양한 책과 기사에 재인용되었다. 주로 경영이나 금융, 정책과 관련된 내용에 많이 인용되었고, 자기계발서에도 흔히 등장한다.

 

유연한 변화에 관한 시대적 강박은 이제 교조적 신념으로 굳어지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바뀌므로, 그에 맞춰 얼른 변화해야 한단다. 정말 그럴까? 급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자는 ‘당연한’ 주장 같지만, 진화적 원리에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세계에는 반대의 경우도 많다. 외려 경직된 반응, 즉 환경 조건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표현형을 만들어내는 형질이 더 유리한 경우가 흔하다. 어려운 말로 협량화라고 한다. 아마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유연성이나 가소성에 비해 ‘대중적’ 인기가 상당히 떨어지는 용어다. 유연이든 경직이든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일이 아니다. 당연하다. 유연함이 무조건 유리하다면, ‘유연해야 살아남는다’는 명언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이미 모두 충분히 유연할 테니까.

우리는 변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해로운 결과를 낳듯이, 세상을 새로 쓰겠다는 시도는 대개 비극으로 끝맺는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걸핏하면 현재의 조건에 불만을 품는다…그러나 국가와 같은 커다란 뭉치를 다시 녹여서, 이 거대한 기구를 기초부터 갈아치우겠다고 기도하는 것은 명화에 때가 묻었다고 그림을 지워 버리는 꼴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특히 신중해야 한다. 다리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야 하지만, 다리를 잘라내고 신형 바퀴를 달아주겠다는 의사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늘 듣던 말이다. 그렇게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벗었던 교복을 다시 입어야 했다. 입시제도가 수없이 바뀌는 사이, 청계천도 덮였다 벗겨지기를 반복했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의 모습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현재의 삶’은 설 자리가 없었다. 터무니없는 역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언되었다. 수십 년 전 지어진 광화문은, 수백 년 전 건축기법을 사용해, 미래지향적으로 붕괴됐고, 오랜 과거의 모습으로, 신축되었다. 몰락한 왕조의 건물과 하이테크 유리 건물을 세우려, 토지는 강제수용되고 마을은 철거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60년대 재건국민운동과 70년대 새마을운동. 재건복을 만들어 입고, 혼분식을 장려하고, 국민주택규격을 제정했다. 의식주를 죄다 바꾼 것이다. 80년대는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90년대에는 OECD 가입을 위해 법과 제도를 바꾸고, 심지어 관습과 전통마저 뜯어내고 새로 깔기를 반복했다. 변화를 향한 역설적 타성이며, 유연함을 향한 완고한 아집이다.

 

‘좀 더!’라는 말은 불만의 이론가가 만들어낸 말 중 가장 효과적인 혁명 구호다. 이들은 변화를 찬양하고,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을 좇으며, 이를 위해서는 언제라도 자기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말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끊임없이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바꾸지 않는 것도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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