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인생 자체가 연극인 여자… "지선생, 나 상 탔어요"

최만섭 2020. 6. 11. 05:43

인생 자체가 연극인 여자…"지선생, 나 상 탔어요"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입력 2020.06.11 05:00

제30회 이해랑연극상 서이숙

배우 서이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열연(熱演)'이다. 무대는 관객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소. 배우가 자기감정을 폭발시키면 관객은 눈물의 의미를 찾기보다 배우에게 관심을 쏟게 된다. "무당이 접신(接神)하면 자기 힘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요. 배우도 무대에서 그런 순간을 만나요. 그 흐름에 나를 맡기면서도 동시에 감정 과잉을 스스로 경계하죠. 이성과 감성 사이의 줄타기랄까." 가장 격렬한 감정의 전류가 흐르는 무대에서도 스스로를 객관화해 바라본다. 열정보다 냉정의 배우 서이숙. 전화로 제30회 이해랑연극상 수상 소식을 알렸을 때도, 그는 이전 수상자들에 비해 차분했다. "제가요? 말도 안 돼. 저 아직 이런 큰 상 받을 때가 안 됐는데요…." 이제 연기를 시작한 지 34년째. 이해랑연극상의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서이숙이 받을 때가 됐다"고 결정했다.

연출가 한태숙은 "서이숙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연극"이라고 했다. 1967년 경기도 연천 시골에서 태어났다. 국극단이 약 팔러 오는 것 외엔 연극 비슷한 것도 없었다. 1987년 수원 한 극단에 입단, 1년여 만에 전국연극제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무대에 올라 박수 받을 때,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걸 느꼈어요. 짜릿하더라고요." 1989년 입단한 극단 '미추'에서 2003년 '허삼관매혈기'로 주목받기까지 15년을 주역 한 번 못 해보고 무명 생활을 견뎠다. "한 번도 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언젠가 배우 서이숙을 보러 관객들이 몰려 올 것을 믿었어요." 좋은 말로 대기만성이지만,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며 시간의 공력을 쌓은 세월이었다.

 

배우 서이숙은 큰 소리로 웃었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는 “긴 단역 생활 끝에 처음 주역으로 무대에 섰던 설렘을 잊지 못한다. 오래 다진 만큼 단단한 공력, 힘 있는 무대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구히서연극상(2003), 동아연극상(2004) 등을 받으며 '대학로 블루칩'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하는 배우의 전형이다. '열하일기 만보'에 출연할 땐 열하일기 원전과 관련 책을 다 찾아 읽었고, '엄마를 부탁해'에 출연할 땐 신경숙의 전작을 섭렵했다.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기회니 더 단단한 연기 준비하고 싶었어요. 배경을 공부하니 대사도 더 정확해지고, 남들과 다르게 표현할 자신이 붙더군요."

국립극단 창단 공연 '오이디푸스'로 갈채를 받고, '고곤의 선물' 재공연도 예정되며 배우로서 본 궤도에 오르던 2011년, 덜컥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포메라니안 강아지 두 마리를 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무대에 서기엔 목이 회복 안 돼 TV 드라마를 시작했다. "사극에 대전상궁으로 출연했는데, 고개 빳빳이 쳐들고 깡패처럼 대사를 쳤어요. '저 상궁 누구냐'고 난리가 났어요, 하하! 서이숙만의 접근법이 통한 거죠." '호텔 델루나' '부부의 세계' 등에서도 주연 같은 조연으로 각광받았다. 싱글인 그에게 드라마 출연은 연천에 계신 유일한 가족 어머니(85)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동네 어른들이 '댁네 딸 또 테레비 나오더라' 얘기 듣는 걸 제일 기뻐하세요."

그는 연출가들이 함께 작품하고 싶어 하는 첫 순위 배우다. 연출가 박근형은 '고곤의 선물'을 보고 분장실로 찾아와 그에게 '갈매기'의 주역을 맡겼고, 한태숙은 그에게서 여리지 않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발견해줬다.

작년 서이숙은 '인형의 집 Part 2'에 주인공 '노라'로 출연했다. 입센의 원작에서 노라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굴레를 깨고 집을 나갔다. 여리고 복종적이었던 노라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돼 다시 집 문을 열고 들어서며 연극은 시작된다. "한 작품씩 할 때마다 배우이자 인간 서이숙이 성장하는 걸 느껴요. 내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무대와 관객은 늘 나를 따라와 주고 사랑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해랑연극상이 제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심사평] 연기에 과잉 없는 배우… '이해랑 리얼리즘'과 통해

제30회 이해랑연극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유민영)는 지난달 29일 서울 효자동 이해랑연극재단에서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배우 서이숙(53)을 수상자로 결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서이숙 외에도 배우 강애심·김재건·박윤희·이승옥·장두이·하성광, 극작가 배삼식, 연출가 박근형·최용훈, 무대미술가 이태섭을 후보로 추천했다. 또 경남 지역 무대예술 활성화에 이바지한 연출가 이상용, 사회적 소수자에 주목하는 춤을 선보여온 무용가 안은미도 함께 논의했다. 이어 이해랑 연극 정신을 계승했는가, 평가할 만한 성과와 연극 예술에 폭넓게 기여했는가 등을 기준으로 좁혀 나갔다.

2시간여 토론 끝에 "30년 넘게 꿋꿋이 무대를 지키며 배우로서 신뢰를 쌓았고, 끊임없는 단련과 노력으로 자기만의 빛깔이 있는 독창적 연기 세계를 구축했으며, 늘 무대를 최우선하는 올곧은 연극 정신을 지켜온 배우 서이숙이 이해랑 정신에 부합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또 "발성이 매우 정확하고 연기에 과잉이 없는 배우로, 앙상블을 중요시하는 연기관 등이 이해랑 선생이 추구한 리얼리즘 연극 정신과 맞닿는다"는 평이다.

서이숙은 '허삼관매혈기' '고양이 늪' '고곤의 선물' '오이디푸스' '인형의 집 파트2' 등 무대에 오른 작품마다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고루 받아왔다. 극단 소속 배우로 무명생활이 길었는데도 연극정신을 놓치지 않고 무대를 지켜온 점, 중년 여배우들의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에서도 연극 무대와 TV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해온 점도 높이 평가됐다.  /심사위원 유민영·손숙·김윤철·박명성·한태숙·길해연·김윤덕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1/2020061100048.html